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일4:13~24) 말씀: 이재훈 목사님
모처럼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눈이 오면 출근길이 어렵지만, 땅에 눈이 필요하기 때문에, 눈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올바른 지식에 이르도록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것은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으로 알도록 만드는 책입니다.
체험적으로 알게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단계적으로 알게 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① 그 증거의 첫 번째는, 고백]니다.
사람들이 고백하는 속에는 우리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② 그 증거로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을 통해, 알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① 성부하나님, ② 성자 하나님, ③ 성령하나님, 이렇게 세분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① 성부 하나님은 원래부터 계시던 “여호와 하나님”이고,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②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③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있기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 놓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왜 “온전한 사랑”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알기 이전에, 값도 받지 않고, 그 귀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점차적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서로 사랑 안에]있다”는 것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은 것은 믿겠는데, 부활하신 것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다.
또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은 믿고 싶은데, “삼위일체 하나님 이라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의 전체를 모르시는 분이고, ”전체를 믿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예언된 것이고, 태초부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하십니다.
믿음은 열심보다는,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는 것“은 자기 부모님을 ”내 부모님이라“고 아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을 ”내 부모님이다“라고 아는 데는 누구의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부모님의 생활을 통해서,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행동을 통해서, ”그냥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4장 18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 쫓습니다.
두려움은 벌 받는 일을 생각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되지 못한 사랑입니다.“(요일4:18)
그렇습니다. 남녀 간에 사랑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가면서 차츰 두려움은 사라지고, 완전한 사랑으로 발전됩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를 의심하고, 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두려움으로 막고 있습니다.
죄를 범한 아담이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3장 10절에서,
“제가 동산에서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두려움은 어디서부터 왔을까요?
그 두려움은 죄로부터 왔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두려움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불렀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불렀을 때, 아담이 처음으로 대답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창세기 3장 9-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니
제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창3:9~10)
▶이 두려움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인간에게 없었던 두려움이 죄로 말미암아 찾아왔어요. 아담은 벌거벗은 것이 두려워 숨었어요.
그것은 인간은 두려워서 숨었고, 스스로 옷을 입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옷을 입었어요.
▶그렇다고 두려움이 사라졌을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감추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해요.
두려움을 포장하고, 그 두려움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 두려움은 어떤 문제를 만들어냅니까?
벌거벗은 모습으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깊은 두려움은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그것은 죄책감 속에서 나옵니다.
죄책감에서 나온 두려움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인 18절 말씀에서,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쫒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합니다.
문제는 깊은 두려움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데도, 우리는 그걸 모르고 지냅니다.
또 한편으로, 이런 두려움이 지금 우리에게도 ”유전되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두려움이 있는데, 마치 보험을 들듯이, 우리는 믿는척 합니다.
그것은 ”두렵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종교를 떠나서, ”초파일에는 절에 가고, 성탄절에는 교회에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다원주의도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울로 가는 길은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길이 다르면, “목적지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내가 더 잘해야,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할 꺼야”라고 생각을 하겠지만, 그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사람이 에서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사냥을 했습니다.
그 에서의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진정한 아버지라면, 잡아온 고기가 아니고, 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하니까,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을 했어요.
그렇게 아버지의 조건에 충실하게 만든 것은 사랑 받기 위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인간 안에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가나안 정탐꾼이 10명인데, 모두 다 두려움에 사로 잡혔지만,
① 2명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땅을 정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② 나머지 8명은 두려움에 싸여, “반대로” 말을 전달합니다.
가나안 땅은 안 가보고도 정복해야 하는데, 그들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가나안의 현실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까 읽은 18절의 말씀에도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 쫓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의 효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두려움 자체와 싸우지 말고,
②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온전히 거 할 때,
③ 날마다 성령 안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4장 16-17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구든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완성되면,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행하기 때문입니다.“(요일4:16~17)
온전히 사랑이 완성되면, ”담대함이 생긴다.“고 했어요.
그 사람 안에 사랑이 충만해 지면, ”담대하게“ 변합니다.
▶여기서 담대함이란 어떤 마음의 상태인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자기 안에 있는 이 담대함은 “뻔뻔함”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를 없다”고 우기는 것이 “뻔뻔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안에 양심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담대함을 갖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담대함을 가지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렵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랑을 하면, 겉으로는 예수를 믿으면서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예수를 믿는 기쁨에 비교하면, 그에 비하면,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가 가장 무서운 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구속이 두려워 말하지 않을 때, 광화문에서 비판하는 사람은 죽기를 각오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다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기적을 맛보면서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담대함은 사랑에서부터 나옵니다.
그 말씀이 4장 16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가 다시 풀어서 읽어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누구든지 그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온전히 완성되면, 우리에게 죽음이 다가와도 담대함을 유지하고,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이런 두려움에서 담대함을 찾는 것이고,
그런 마음을 품으니까,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생활에서 두려움을 담대함으로 바꿔서, 체험하는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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