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이레, 90일의 기적, 사순절 회개 기도회

영생의 증거는 사랑입니다 (요일3:11~24) 2021.01.05

다이나마이트2 2021. 1. 5. 17:07

영생의 증거는 사랑입니다  (요일3:11~24)      말씀: 이재훈목사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요한일서 3장의 내용입니다.

기독교인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성도들은 “날마다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매일 기적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이켜 보면, 어떤 순간에 모든 일들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그 순간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어쩔 때는 그 순간이 너무도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또 반대로, 어쩔 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질 때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라면, 우리가 온전히 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자와 같이, 매일 매일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의 자녀 됨을 깊이 깨닫게 만드는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알면, 우리의 삶에 근본적으로 변화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신 것이 바로 이 정체성입니다.

 

예수님이 그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한일서를 읽은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모르는 분들이 계시니까, 이 말씀을 드리며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① 첫째는, 하나님과 갈라놓았던 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② 둘째로, 우리 안에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제한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 앞에서 말씀드린 두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가 죽으시고, 그러나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통해서, ”영생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의 몸으로 옮겨진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요일3:14)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설명한다면, “종교적인 율법”이 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기에,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몸“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 몸 안에 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영원한 생명을 말하는 것인데,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한 몸으로 연합된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는 늘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늘 기쁨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선물로 받기에는 너무도 힘든 목표이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 영원한 생명도 나는 믿지 못할 것입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연과 물질의 세계는 질서가 있는데, 그것이 무너져서 무질서가 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법칙이 열역학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종노릇에서 해방되는 것”과 같이, “결국에는 영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엔트로피 법칙입니다.

 

그 후에 이탈리아 수학자 Luigi fantappi로부터 신 트로피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해서,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제 제가 먼저 헌혈했는데, 사람의 몸에서 빼낸 피가 없어졌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몸에서 빠져 나간 만큼, ”다시 채워진다.”는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원리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다툼이 있는 곳”에 회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미움이고, 이런 다툼은 분열로 어지럽게 만듭니다.

서로가 사랑하지 않고, 신뢰하지 못하므로 생기는 소모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그것만 없애버리면, 세상의 결핍 현상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엔트로피 법칙에 소모되어 가는 인생이 되는 것이 죽음인데,

그러나 신트로피 법칙으로, 그 회복의 능력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의 말씀도 “미움에서 살아나는 것”을 설명해 줍니다.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살인자는 누구든지 그 안에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3:15)

 

미움은 죽음에 속한 것이고, 미움을 이기지 못해서, 살인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나 이들의 문제는 놀라운 복음의 가치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구약의 십계명을 읽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살인만 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킨 것으로 해석을 하지만, 그것은 아니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말도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나는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으니까, 나는 사람을 사랑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에는 보다 적극적인 포용과 넉넉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살인의 원인과 동기까지 검토하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은 모든 미움을 버리고, 스스로 사랑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진실한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소속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그 소속이 ”죄의 종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가능해 진 것입니다.

 

디시 말씀드려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우리의 신분 옮겨졌기 때문에, 가능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사랑하므로” 우리가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잘 16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우리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3:16)

 

공교롭게도 요한일서 3장 16절의 말씀과,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의 내용이 동일합니다.

그러나 순서를 보면, 약간 다릅니다.

 

요한복음에는, “사랑하셔서 영생을 주었다”는 말씀이고,

요한일서는 “영생을 소유하니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에 대한 증거는 두 가지입니다.

① 첫째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고,

② 둘째로, 어려운 형제는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면, 궁핍한 형제를 도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18절 말씀에서, “자녀들이여,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라고 행동과 진실을 강조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사랑은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움직여야 하고, 행동을 나타내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사랑은 “자신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남을 사랑하면, 먼저 자신이 행복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사랑은 자신이 누리는 축복”이 됩니다.

 

3장 20절 말씀에도, “혹시 우리 마을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요일03:20)

 

우리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로써, 우리에게 드는 확신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에 가책이 있어도, 하나님은 모두 아시니까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담대한 마음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서로 사랑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하나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도 그 사랑 안에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 나도 물론 즐거운 일이지만, 그것보다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물론 예수를 믿고, 사랑을 하지만, 남을 도와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나 혼자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옛 습성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어서 변해야 하는데, ”거기에 따라 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새 사람으로 변화 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일서는 무너지고 망가진 정체성을 다시 세워주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요한일서에서는 유독 “알다”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알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단순한 추측이나, 가정이 아닙니다.

“알다”라는 말은 체험적인 지식이요, 확신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으로서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간신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간신히 구원받는 자녀가 아니라,

구원의 감격과 축복을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