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인가? 감동인가? (행21:37-4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즘 [사이버 렉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온라인] 상에서, 어느 특정인에게 일어난 [이슈]를 집중적으로 다루며,
비판하는 “유튜버에 대한 별칭”입니다.
그렇게 “그 일에 참여한다.“고 하여, 콘텐츠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지 않더라도 이슈화하려는 의도를 나타내어, 세상은 이런 [사이버 렉카]들에 의하여, ”선동의 시대“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열렸던 복음주의 선교대회인 [로잔 대회]를 ”종교 통합 운동이라”고 선동하던 분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CGN으로 중계를 했는데도, 내용은 들어보지도 않고, 그런 선동을 믿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에 나타난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선동]에 의해서, 매우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누군가 [바울]을 ①4천 명의 자객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킨 사람이고,
②광야로 나간 이집트 사람이라.“ 고 바울에게 누명을 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을 모함하여 누명을 씌웠는데, 사람들이 곧 바로 이 말을 믿고,
선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반응한 사건입니다.
또 하나의 선동은 유대인들이 만든 것인데,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반대하며,
”성전에 이방인까지 데려와 더럽혔다.“고 선동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었고, 군중들이 난폭해져서 [바울]을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씌운 죄목은
①[변절자]이고, ②[반란자]로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난 군중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기회를 얻습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 법치주의 국가이므로, 군중 심리에 휩싸여 선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흥분하는 청중들에게조차 정중하고, 예의 있고,
품위 있는 언어로 선동을 잠재우는 감동적인 연설을 합니다.
[바울의 연설]에는 감동을 주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첫째는/ 그 내용이 ”자신이 단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신분]이 ”죄수“가 되는데, 여러 번 자기 해명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수로서의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초점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내면과 인격“은 억울한 일을 당해보면, 나타납니다.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고, 복수심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몰렸는데도,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타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세상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할까요?
선동하는 이들은 ”모두 자기를 따르게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세상을 감동시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초점을 두는 것입니다.
(2)둘째로/ 그 내용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인해,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변화“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재 모습은 유대인에 대한 변절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한, “변혁의 트랜스포메이션이라.“고 말합니다.
▶22장 전체에 나타난 [바울]이 말하는 ”고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은 알았지만, 나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내가 부활하신 그분을 내가 직접 만나고 나서, 그리고 그분은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나를 부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이전과 주님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의 비전, 야망, 꿈을 성취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던 사람이 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제거하는 것이 바리새인으로서, ”자신에게 합당한 생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①그에게 강렬한 빛이 임하여, 그의 눈이 잠시 보지 못했지만,
②그 빛은 그의 영혼을 파고들어서, 강렬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춤으로,
그가 변화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어둠에서 빛이 비치라.’고 명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비추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빛]을 통해서, 잠시나마 자신의 눈이 멀게 됐지만,
”예수님의 [영혼의 빛]을 보게 된 것“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변화를 이끌어갈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야말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을 [변혁]이라고 하는데, 단지 [체인지]가 아니라, [트랜스포메이션]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새 사람이 되는 변혁“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내 머릿속에 담겨 있을 뿐이지만, 잘못하면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교만하고
자신의 생각에 더 갇혀버리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 지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그것은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랬고,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것을 조용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3)셋째로/ 그 내용이 “[자신의 비전]이 아닌,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나의 비전]이 아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비전]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셨다는 그 부르심”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밀히 말해서, [비전]이라는 단어보다,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의 내용”을 알려주실 때,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도록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2장 10절에, “주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께서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거라. 거기서 네가 할 일을 모두 일러줄 것이다.“(행22:10)
하나님이 [바울]에게 직접 알려주실 수도 있음에도,
▶왜, 굳이 [아나니아]에게 가서, 듣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울의 부르심]은 개인적인 부르심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부르심]은 ”공동체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이 [그런 부르심]을 가지고 활동했을 때,
누군가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아나니아]였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실 때, 인격적으로 찾아오셨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것은 매우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그러고 나서 ”왜, 나를 핍박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실 때, 바울은 깜짝 놀랐을 겁니다.
[바울] 자신은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이 없고, 오로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핍박받는 성도들과 함께, 핍박받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머리]시며, 우리가 “그분의 몸으로서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을 뿐인데, 예수님이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묻는 것은
”그들에 대한 핍박은 곧 나에 대한 핍박이다.“는 해석에 [바울]은 엎드려졌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앞을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에, [영의 눈]을 뜨게 되었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에 대하여,
눈이 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즘 같은 [선동의 시대]에, 선동에 이끌려가지 말고,
”오직 [성령의 감동]에 따라,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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