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전염시키는 증인 (행24:10-21) 말씀: 이재훈 목사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보면, ”[믿음]이 전해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은 마치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코로나]를 겪었는데, 그것은 “전염병이 퍼져나가듯”이 무서운 속도로 전염되었습니다.
때로는 한순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대한 전염“도 이와 비슷합니다.
[믿음]도 때로는 순간의 만남, 한 번의 대화로,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역사함으로, 그 믿음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믿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이니까,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이제 로마의 재판정에서 재판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주변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으니까,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가리켜 ”폭동을 일으키는 전염병 같은 사람“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거짓이지, 그는 폭동을 일으킨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그리스도의 증인“은 믿음을 전염시키는 전염병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사회에 믿음을 전염시키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의 사상과 문화에 전염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떤 권력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믿음을 전염시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24장에서 [바울]은 3명의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증합니다.
이 재판의 과정을 통해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보면, 의연하며 담대하며 전혀 위축됨이 없이
자신의 믿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전혀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세상의 혁명가로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혁명가]가 아니라, 세상에 거짓된 질서를 ”하나님의 복음으로 다시 회복시키는 증거자”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산헤드린공의회가 참된 믿음을 억압하고 있었을 때, [바울]은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맞서서 믿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는 [종교 개혁]을 일으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비텐베르크]라는 아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내용은 “면제부 발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회개해야 된다.“는
[작은 몸부림]이 하나님의 엄청난 도구가 되어서, [프로테스턴트]인 [개신교]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사회의 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진리를 왜곡할 때,
”두려움 없이 믿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심각한 것은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자유롭게 가르치지 못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헌법에서 부여한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개정하려고 ”사학 미션 단체“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미션 스쿨]에서 매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에,
성경을 몇 구절 읽고 기도하고 시작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왜, 그때는 되고, 지금은 안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잘못된 법이 들어온 것“이고, 그 이면에는 ”잘못된 이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이념들이 공격할 때, 제일 먼저 [창조]를 공격했습니다.
[진화론]으로 [창조론]을 공격했는데, 창세기 1장을 공격하는데,
이 [사회적 성]이라고 하는 것이 [젠더 이념]으로 변하여 [가정]을 공격한 겁니다.
[진화론]으로 창조를 공격하고, 이런 [젠더 이념]으로 가정을 공격함으로, 창세기 1장 2장을 무력화시킨 거예요.
그래서 3장으로부터 시작하니까, [타락한 사회]로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형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1장 2장의 질서를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은 괜찮은 것인데, 왜, 3장부터 시작을 하니까, 그런 거예요.
[사탄]은 1장과 2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진화론]으로 창조를 공격하고,
그리고 이런 [젠더 이념]으로 ”가정을 공격“함으로써,
하나님 없는 세상이 바로 3장으로부터 시작되는 [죄의 개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므로 ”교회가 함께 일어나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을 지키고, 사회가 거짓된 이념으로 하나님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저는 [바울]이 로마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우리가 넋 놓고 있는 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건학 이념]에 따라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에 대해서 잠잠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 국회의원도 만나고, 정부 관계자들도 만나서, 우리가 함께 힘을 합쳐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위축되지 않고, ”믿음을 전염시키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가장 억울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전염시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천부장]이 바울을 꺼내서, 바울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알고,
긴급히 몇 백 명의 군사들을 호위해서, 바울을 [가이사라]로 보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이제 바울에 후송된 것을 알고,
그다음 날 바로 몇몇 장로들과 변호사를 데리고, 가이사랴까지 쫓아와서 바울을 고소합니다.
5절 6절에, ”저희가 알아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사람으로 온 세상에 퍼져 있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이며, 심지어 성전까지 더럽히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붙잡은 겁니다.“(행24:5-6)
여기에 세 가지 내용을 고소합니다.
①첫째,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로마 정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의 목표는 평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소요]와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에 대해서 매우 엄히 다스리려고 [바울]에게 그런 혐의를 씌운 것이죠.
②둘째,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는 것도 로마 정부가 지배하기 이전의 종교들은 다 허락해 주었으니까,
그러니까 [유대교]도 허용해 주었지만, 그 이후에 생겨나는 종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혐의를 만들어 씌운 거예요.
첫째나 둘째나 다 로마 정부가 원치 않고, 처벌하게 만드는 그러한 제목입니다.
③셋째, ”성전을 더럽히려고 했다.“는 것은 교묘한 화술입니다.
그냥 ”더럽혔다.“고 하면, [증거]가 없으니까, ”더럽히려고 했다.“고 혐의를 씌운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해명합니다.
①첫 번째/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12일 동안 어떻게 내가 대중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인가?
②두 번째/ ”나사렛의 이단의 우두머리“라고 할 때, 나는 이 사람들이 산헤드린 공회원과 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약 [이단]이라면, 이들도 다 이단이다. 나는 예루살렘에 온 것은 동족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려고 온 것뿐이다.
그러면서 14- 15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 ”그러나 제가 각하께 이것은 시인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도]를 따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습니다.
또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같은 소망을 두고 있으니,
그것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행24:14-15)
여기서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소에 대해서는 그가 성전에서 정결 의식을 행할 때, 어떤 소란도 없었고,
군중도 없었고, 만일 그때 내가 성전을 더럽혔다면, 그때 온 아시아 사람들, 유대 사람들이 나를 직접 고소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해명]은 명쾌하고 진실합니다.
[바울의 해명]은 그의 양심 앞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해명이기 때문입니다.
③세 번째로/ [그리스도의 증인]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심으로 믿음을 전염시킨다.“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에,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행24:16)
신약에 [양심]이라는 단어가 32번 나오는데, 21번을 [사도바울]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양심의 사람]입니다. [양심]은 수천 수만의 증인과 같은 것이며,
아무도 두렵게 하지 않는 좋은 친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엄청난 핍박과 음모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거리낄 것이 없는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기에,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의 증거가 없고, 내가 인용한 성경에 잘못된 것이 없다면,
또 하나님의 말씀에 메인 나의 양심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주장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건 [성경]에 분명한 증거가 있고, 이성의 증거가 있고, 잘못된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취소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양심]은 하나님을 우리가 찾아갈 수 있게 해주며,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서, 양심이 깨어져 버렸어요.
어느 아메리칸 인디안 부족에서는 양심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으로 형상화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쁜 짓을 할 때, 마음이 떨리고, 불편한 것은 삼각형이 회전하니까
그 목소리가 이 심장의 벽을 자꾸 해치기 때문에 ”아프다.”는 거죠.
그런데 계속해서 돌아가다 보면, 무디어져서 나중에 [원]이 돼버려서, 더 이상은 양심이 가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디안들은 어린아이의 양심은 [삼각형]으로, 그리고 어른들의 양심은 그냥 [원형]으로 표시했다고 합니다.
화인 맞은 양심이죠. [선한 양심]이란 한 번도 죄 지은 적이 없는 양심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탈락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경험하고, 중생한 양심입니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심으로,
그런 [선한 양심]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바울]은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심으로 행했기에, 그가 만난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신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하나님과 자신의 양심이 증거하기에,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증인된 고백입니다.
이런 [선한 양심]은 ”반드시 사람을 전염을 시킨다.“는 거예요.
이런 [선한 양심]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빌라도]가 연상이 되는데, 그는 세 번씩이나 ”죄가 없다 죄가 없다 죄가 없다.“고 예수님을 평가했지만,
결국 자신의 위치를 보존하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었듯이, 비양심적인 모습이 여전히 나타납니다.
[선한 양심]이 우리를 두드릴 때, 마음을 열고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양심은 더 악해져서 연약한 양심이 되고,
부패한 양심이 되고,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런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보여준 [바울의 증인 된 모습]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통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군가를 통해 믿음을 전염을 받았고, 또 누군가에게 믿음을 전염시키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바울]이 보여준 [증인된 모습]을 우리들도 따르길 바랍니다.
어떠한 권력 아래 일지라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거리낄 것이 없는 양심으로 믿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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