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달게 받겠습니다 (행25:1-1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면, 모든 상황에서도 [기회]가 됩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온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에 [조건]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인데,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주저함 없이 그 길을 가고 있었기에,
오늘 말슴을 세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본 [러브 소나타] 사역이 시작된 것은 하용조 목사님께서 치료 때문에 일본에 머무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생명의 연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일본의 선교사로 보내셨다.”는 믿음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도시마다 다니며, “복음을 전하도록 나를 사용하셨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것은 “치료받아야 하는 환자”로서 할 생각 일은 아니지요.
어느 누구도 생각을 할 수 없는 일을 “죽음을 각오한 믿음의 사람”이 결정할 일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기회가 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심으로”
[러브 소나타] 사역이 일본 열도를 깨우는 귀한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믿음]이고, 이것이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2) 둘째로/ [바울]이 이렇게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거센 공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권력자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증인이 된 것은 “바울을 죽이려고 계속해서 고소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유대 지도자들의 이런 끈질긴 고소와 압력이 없었다면, 로마 총독들이 바울을 눈여겨보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바울]을 재판했던 벨리스 총독은 바울의 무죄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2년이나 감옥에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풀어주면, 유대인들을 자극할 것을 알았기에,
“자기의 정치적 입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2년 뒤 총독으로 임명된 [베스도] 총독도 부임하자마자,
그에게 가장 골치 아픈 과제는 “바울이라는 죄수의 처리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3일 만에 예루살렘부터 방문한 것은 유대를 통치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의 권력기구인 공의회와 원만한 관계를 맺기 위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산해드린공의회]는 여러 가지 중한 죄목으로 고소했지만, “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고소]는 “정치적인 것”이지만, [증거의 내용]을 보면 총독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종교적인 내용”이니까,
“바울의 무지함을 알고도 풀어주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고 싶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무지하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정치가의 비겁함”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로부터 무고하게 가해지는 공격”은 나를 더 견고하게 세우며,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영역이 더 넓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여러분, 깊은 바다 속에 있는 [물고기]를 보십시오. 그 바다 속에는 [수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인간이 견고한 철판으로 만든 [잠수함]도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도, 작은 물고기들이 아주 유유히 다니고 있어요.
그것은 [작은 물고기]는 그 엄청난 수압을 이기는 겁니다.
그건 뭡니까? 수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수압이 있어도 그것을 상쇄시키는 어떠한 신비한 생명의 힘이 그 안에 있는 거죠.
이와 같이, 엄청난 힘이 짓누를지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사람은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에게는
그 모든 세상의 압력을 상쇄시키는 ”내적인 능력을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셋째로/ [증인의 사명]은 “최후의 한 사람에게까지 증거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증거하고,
결국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활용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
25장 11절의 말씀에, “그러나 이 유대 사람들이 나를 고소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그들에게 넘겨줄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행25:11)
[가이사]는 영어로 표현하면, [시저]이고, [시저]는 이름이 아니라,
황제 혹은 오늘날의 ”대통령과 수상”이라는 [직위]를 말하는 거죠.
당시에 [시저]는 “[가이사]는 [네로]”였는데, 로마 시민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자신의 법적 문제를 [가이사]에게까지 상소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가이사]에게 상소합니다.”라는 이 한마디로,
총독이 관할하고 있는 사법권을 벗어나서 로마에 있는 황제의 최고 법원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바울]이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고, 풀려나기 위해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지만,
그러나 저는 [바울]이 한 말은 “나는 [가이사]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결심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신이 풀려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만날 수 있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말하는 ”최후의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가이사]인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최고 권력자“이지만,
역설적으로 ”[죄수]가 만날 수 있는 최후의 한 사람”이지요.
그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지요.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지는 것이죠.
[바울]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을 했고,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하는 대상자”였습니다.
그는 “죄수라는 신분”으로, 로마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나서, “증인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때로 억울한 죽음일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기쁘게 죽음을 달게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기회”라면,
그들 모두는 “어떠한 상황도 달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믿음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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