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녹슬지 않는 증인 (행23:1-11, 31-3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만 주시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도 함께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죽음에 이르는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용기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의 임재가 그에게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에서 환상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마라. 잠잠히 잊지 말고,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격려해 주었고,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 ”서둘러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거라.
이곳 사람들은 네가 나에 대해 증언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고 알려 주었고,
그 날 밤에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나에 대해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 말씀은 ”이제 수고했으니, 쉬어라.“가 아니라, ”더 큰 일을 하라.“는 말씀이고,
”더욱 담대하게 로마에서도 증언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증언에서 ”예루살렘이 끝이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상황들을 볼 때도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이 끝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바울의 증언이 이어 지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획]이 바뀐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도 ”한 번에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에게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날에 있을 일을 ”지하철 노선표“를 보듯, 한꺼번에 다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미리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대로, 상황을 보고, 다음의 발걸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바울]을 통해, 배우는 [그리스도의 증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첫째로/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바울은 공회를 독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그는 ”담대함“을 보여주고,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고, [선한 양심]을 따라 행동했습니다.
▶험한 세상에서 공격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내적인 힘“은 [선한 양심]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태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그 입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세속적이고, 탐욕적이고, 불같은 성격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위축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반응하며 지적했습니다.
3절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은 회칠한 무덤과 같소, 당신은 거기 앉아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면서,
도리어 당신 자신은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명령하고 있지 않소.“라고 당당히 맞섰습니다.
▶이 얼마나 담대한 말입니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에서, 사두계파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은 놀랬고,
마치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세례요한]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2) 둘째로/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신사적이라.”는 겁니다.
5절에,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기록되기를 ‘네 백성의 지도자를 모욕하지 말라‘고 했으니 말입니다.”(행23:5)
이 말씀은 출애굽기 22장 28절에 나오는
“하나님 모독하지 말고, 내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담대함]이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욕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함]이란 원수 같은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그리스도의 증인]은 담대하며 동시에 신사적입니다.
요즘의 사회를 보면, 양 극단으로 대치되어, “나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적이 되는 사회”가 되어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의견과 인격을 구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인격을 무시했다.“고 분노하지만,
그러나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서, 토론하고 치열하게 주장할 수 있지만,
그러나 서로의 [인격]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사적인 행동“입니다.
(3)셋째로/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가 있습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공회원들]이고, [사두개파 사람들]인데, 구약시대에 성전을 관리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이니까,
성전을 매개체로 ”자신들의 이득과 탐욕을 추구하고, 권력화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심지어 [부활]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고, [영의 세계]도 믿지 않는,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틈을 이용하여, 지혜로운 판단“을 했습니다.
[바울]이 호소하기를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오. 내가 이처럼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기 전에, 이미 성경의 구약에 죽은 자의 부활의 소망을
이미 보여주었고, 여러 표적을 통해 약속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고,
[사두계파 사람들]과 논쟁이 벌어져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죠.
아마 그들이 똘똘 뭉쳐서 저렇게 됐다면, [천부장]이 개입하기가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데 “그 틈을 벌리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가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공격을 받는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전신 갑주를 입고, 방패를 쥐고 있지만, 적들은 무한 공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러분 [칼집]은 어떻습니까?
혹시 오래 있는 [칼집]이라면,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유사시에 싸워야 되는데, 녹슬어서 나오질 않는다면, 어떨까요?
[사도 바울]은 녹슬지 않았습니다.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 깨어 있었기에,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의 칼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도 신앙을 녹슬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파헤치고,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4)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은 “역설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이제 바울이 [천부장]의 보호를 받아서,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소동하는 가운데,
[천부장]이 바울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다시 산헤드린공의회로 데려오도록 요청을 합니다.
그 감옥에서 공의회로 오는 길목에서 “바울을 죽이겠다.”는 음모를 수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엄청난 암살 음모를 놀랍게도 [바울의 조카]가 듣게 하십니다.
이름도 모르는 [바울의 조카]가 이런 계획을 엿듣고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알립니다.
[천부장]은 밤 9시에 어둠을 타서,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라]로 급송하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런 계획은 [천부장의 신앙]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바울]의 어떤 인척 관계가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영역에서 불필요한 암살로 인해서,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안전하게 호송하려 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유대인들의 음모]가 도리어 안전하게 호위를 받으며,
그것도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탔든지 나귀를 탔든지 동물을 타고 가는 거예요.
▶이런 [호의]를 받으면서 갈 수 있게 만든 분이 누구입니까?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19세기 중반에, 30년 동안 아프리카 전체를 다니며 60만 명 이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던 증인이 된
선교사 [리빙스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의료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지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처음에는 중국의 선교사로 가려고 했지만, 아편 전쟁으로 인해 가지 못하고, 아프리카로 가게 되었어요.
그는 [노예무역]을 막으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오해도 많이 받았어요.
그 당시에 아프리카 선교 여행에는 맹수와 질병과 시달렸고,
또 어떤 지역은 무조건 죽이는 식인종들도 있어, 원주민들의 위험에 끊임없이 위험에 시달렸죠.
그가 ”나는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죽음]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실 것이다.“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과 [리빙스턴]의 모습은 비슷합니다.
[바울]과 [리빙스턴]은 모두 살해 위협과 질병의 고통에 시달렸지만,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어떠한 공격과 위협에도 녹슬지 않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어서,
담대하고, 지혜로우며, 신사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체험하는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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