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3] 서머나교회 (계2:8~11) 말씀: 강부호 목사님
오늘은 일곱 교회 중에서,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서머나 지역]에 있는 다른 교회들은 [로마]에 충성하여, 황제를 위한 신전을 건립하고,
“그 대가로 정부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서머나 교회]는 환란을 겪었고, 궁핍한 생활을 할망정 ”황제에게 충성할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충성하기를 선택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서머나 교인들]은 주님께 대한 충성을 고백하고,
”경제가 불안정해 지고, 핍박을 받더라도 [주님의 길]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도, 우리에게도 흔히 경험하는 일입니다.
①타협하지 않고, 고집을 세우면, 그게 지혜로운 행동이냐?
②그렇게 해서 너희들에게 어려움을 당하면, “그게 올바른 행동이겠냐?”라며 다양한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친구가 동일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하면, 뭐라고 조언을 하시겠습니까?
이건, 쉬운 문제는 아닐 거예요.
더구나 [서모나 교회]의 어려움을 가중시키는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1) 먼저 2장 9절에, ”자칭 유대 사람이라 하는 사람들의 모욕도 알지만,
실은 그들이 유대 사람들이 아니라, 사탄의 집단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칭 유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그들은 “사탄의 집단”이라고 말씀 하셨어요.
10절에 보면, “너는 고난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마귀가 너희 가운데 몇몇을 감옥에 집어넣을 텐데,
너희가 10일 동안 핍박을 받을 것이다. ‘너는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계2:10)
▶이게, 어떤 상황에서 나왔습니까?
[자칭 유대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으니까, [신앙에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로마의 공권력과 결탁하여, 교회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 집단이 ”사회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명목으로 교회를 고발을 하겠죠.
그 당시에 서머나 지역의 분위기로 봐서, 로마에 충성하기에,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부르심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고 주석가들은 설명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교회를 불법 단체로 만들고, 교인들을 고발하는 “자칭 유대 사람이라.”고 하는
[한 부류의 무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2) [또 다른 부류]는 2장 10절의 마지막에 보면,
“너희가 10일 동안 핍박을 받을 것이다.”고 하는데, “10일 동안 핍박을 받는 장면”이 어디서 인용된 것입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다니엘서]에, 세 친구들“과 함께 나옵니다.
다니엘서 1장 12절에, “끌려갔던 다니엘과 세 친구”가 그렇게 말합니다.
“열흘 동안만 당신의 종들을 시험해 보십시오.
우리가 채소와 물만 먹고 마신 후”(단1:12)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우상 앞에 있었던 그런 음식 먹이지 말고, 채소와 물만 먹이면서 시험을 해 보라.”는 말씀이고,
①왕의 귀한 음식을 먹은 젊은이들과
②채소와 물만 먹은 우리의 얼굴을 나중에 비교하고,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마음대로 하라”고 자신들을 관리하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요청을 받아들여서, [열흘] 동안 그들을 시험을 하고, [열흘]이 지났을 때, 그들의 얼굴을 보니까,
왕이 내린 귀한 음식을 먹은 젊은이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건강하고 좋아 보였다.“는 [사건]에서 인용된 거예요.
▶ ”[다니엘]과 세 친구“는 어떤 마음에서 이렇게 했습니까?
당시 고대 근동에서 ”왕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왕에게 충성한다는 표시”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함으로써 내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결단한 자라는 메시지가 흘러나와야 되겠느냐? “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다니엘]에게는 “나를 영광스러운 자리로 이동시킬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지, [우상]은 아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 기대어, ”내 삶의 이익을 꾀하지는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확실하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상 두 사례에서 보았지만,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이해하기 바랍니다.
2장 9절에, ”내가 네 환란과 가난을 알지만, 실은 네가 부자다.
또 내가 자칭 유대 사람이라 하는 사람들의 모욕도 알지만, 실은 그들이 유대 사람들이 아니라 사탄의 집단이다.“(계2:9)
[주님]이 ”나는 안다. 니가 지금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는데, 실은 네가 부자다. 네가 잘한 거다.
영적인 풍요는 너에게 주어질 것이다.“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칭 유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했던 일, 그것도 내가 안다.
그런데 그들은 자칭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 그들은 사탄의 집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건 무슨 말입니까?
그들로부터 솟아난 처세술은 그 아이디어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아이디어는 아니라.“는 거죠.
그렇다고 그들이 갖고 있던 [토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닌 겁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이건 ”사탄적인 것“이고, [땅]에 속한 것이고,
어떤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으로 본 것이죠. ”그들은 미혹된 것이라.”고 보신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로마 권력에 고발까지 해서, 곤경에 빠뜨리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교회를 2장 8절과 같이, “너는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처음이오. 마지막이신 이,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충성된 증인으로서 죽었다가 살아난 자”로 스스로 자신을 이해하고,
▶여기에[ 나오는 “그리고 처음이요. 마지막이다.“는 말은 뭡니까?
”끝까지 살아남아 다스리는 자“가 [이기는 자] 이니까,
”최종 역사의 주관자는 주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예수님 자신이 누군지를 설명하시면서, 실은 내가 부자다 말씀하시면서,
그리고 10절로 이어지면서는 ”그 고난을 내가 치워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0일]은 충분한 기간일 수도 있고, 제한된 기간일 수도 있지만,
그러면서 [안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너는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다.“고 [권면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해라.“는 말은 ”그냥, 교회 일 열심히 하라“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이런 것보다도 ”죽게 되기까지,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정체성“이고, 우리의 [할 일](= 사명)”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지키는 일”이 박해 속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믿음을 붙들고, 싸우라“는 말입니다.
▶”누구에 대한 믿음“을 지켜냅니까?
그 분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은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충성이 아니고, ”하나님과 약속에 대한 충성“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 가운데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말씀입니다.
”내 삶을 결정하는 주체“가 [다른 것]이 아니고, 내 삶의 주관자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외에는 내가 내 신뢰를 드릴 존재는 없습니다.
이것에 대한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해라 이거를 오히려 설명을 하시더라고요.
▶[서머나] 지역의 이름이 헬라어로 [몰약]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우리는 ”어디에 썼는?“를 우리는 알고 있어요.
[방부제]로, 시신 처리할 때 사용하는 향품과 향료죠.
그러니까 [서머나]라는 의미는 ”고난을 받아서 죽기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향기를 풍겨내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2장 10절을 다시 보면,
”너는 죽도록 충성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줄 것이다.“는 말씀은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고난을 겪더라도 주님이 그냥 놔두시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걸 통과해서라도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면류관]도 두 종류가 있어요.
①하나는/ [땅]에 속한 “권위와 힘을 상징하는 면류관”으로,
이것은 [악한 존재]와 연결되는 우리가 사는 “[땅]이 주는 면류관”입니다.
② 두 번째 면류관은 [영]에 속한 것으로, “주님이 주시겠다.”는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 면류관은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자에게 준다.“고 했고,
[영]적인 권위를 부여해 주는 ”명예로운 면류관”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충성된 증인으로 승리하셨을 때, 승리자일 때, 받게 되시는 면류관.
오늘 계시록 2장 10절에 나오는 서머나 성도들처럼,
“믿음을 지키는 승리를 거두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시험을 견디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인정을 받은 후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약1:12)
또 디모데후서 4장 7- 8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경주를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고,
이제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으니,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 내게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이다.“(딤후4:7~8)
오늘, 토요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에게 이런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 면류관은 어떤 능력을 표현합니까? 그것은 계시록 2장 11절에,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사람은 둘째 사망에서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계2:11)
지금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사람들이 ”둘째 사망에서 해를 받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요한계시록 20장 6절에,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은 복되고, 거룩합니다.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 권세도 갖지 못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것도 능력인데, ”무슨 일을 행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인데,
”이긴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아무런 권세를 행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어떤 면류관을 뒤집어 썼다고 할지라도,
생명의 면류관을 쓴 자들을 그들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건들지 못한다.”는 거예요.
[둘째 사망]이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을 행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자들은 어떤 자격을 얻게 됩니까? 요한계시록 20장 4절에 보니까,
도리어 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쓴 그들에게, ”심판할 권세가 주어진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정한 권세]를 주십니다.
그들에게 ”심판할 권세“를 주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준이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시고,
그들은 다시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통치를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창세기에서 원래 주시고자 했던 ”만물을 다스리게 하는 능력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모르는 거예요.
▶이게 무슨 축복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갈 때,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고, 정확한 판단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그런 능력이 필요한데, ”그것에 합당한 권세와 능력을 주님께서 부여해 주시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예비하시고, “이런 것을 주시겠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합당한 태도”는 뭘까요? 그것은 “우리가 받기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면류관]이라고 표현된 [축복]이 있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과하여 믿음을 지킬 때, 우리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능력]이 충만해져서,
여러분이 거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여러분으로부터 시작되시길 축복합니다.
반대로, 거꾸로 말하면, “이 땅에서 타협하고, 다른 존재를 숭배하고 의지한다면,
죽음의 힘이 개입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구나.
내 삶에, 내가 그리스도를 놓아버리면, 둘째 사망의 권세로 대표되는 죽음의 힘이 내 삶에 유입될 수 있기에,
”내 삶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는 않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게 임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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