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4] 버가모교회 (계3:12~1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격려하시기 위해 “요한을 통해 보내신 편지”입니다.
2장과 3장에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들이 나오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씨리즈로 살펴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버가모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①에베소 교회와 ②서머나 교회에 이어서,
오늘은 ③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를 살펴볼 차례입니다.
[에베소]가 당시에 오늘날의 뉴욕과 같은 상업 도시였다면,
[버가모] 지역은 워싱턴과 같은 정치 도시라고 해석하면 됩니다.
그 당시 [버가모]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신전이 세워져서 졌으니, 우상을 숭배하는 중심지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주시는 [일곱]이라는 숫자는 당시의 교회들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 외에 다른 교회들,
오늘 이 시대 교회들이 계시록의 말씀을 올바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고,
①창조 이후 타락한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②[새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①창조와 ②새 예루살렘 사이에” 어느 한 시점에만 이루어지는 싸움이 아니라,
계속하여 내내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갈등의 관계에 있다.”는 것,
결국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며 부수시며,
이기시는 승리로 약속하신 말씀이 전체 역사 속에 내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로부터 새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두 진영 간의 계속되는 싸움은,
①어린 양을 따르는 충성된 자들로 표현되는 일곱 교회만이 아니라,
②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과 그리고 [용]의 지시를 받아서 [바벨론]으로 표현되는 세력 속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어린 양들을 박해하는 자들과 “싸움이 계속 진행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전체를 보여주는 구조에서,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말씀이 요한계시록 17장 1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 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17:14)
이 말씀은 두 부류가 계속 싸우는데, 결국에는 [어린 양]이 이길 것이며,
또한 “어린 양을 따르는 충성된 이들도 이길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서, [계시록]에는 여러 [환상]들이 보이는 겁니다.
복잡해 보이는 7번의 심판, 일곱 심판이 3번 다른 상징으로 반복이 되죠.
이것은 “악에 대한 완전한 심판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하여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용]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용과 바벨론]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며,
결국에는 “[어린 양]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확신시켜주기 위해서/ 많은 환상들을 보여주고,
한 가지 환상들이 끝날 때마다 그 당시 일곱 교회 성도들은 아멘을 하면서 그렇다“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 어려운 것은 교회가 처한 환경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바벨론과 같은 야수로 둘러싸여 있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린 양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용의 지시]를 따르는 [바벨론]이/ 호시탐탐 교회를 집어삼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보면, [바벨론]의 영향력이 교회를 둘러싸고 있고,
일부 교회의 모습에서 ”바벨론화 되어 있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책망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영향을 받아서 ”무너져 가고 있는 모습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①먼저 [바벨론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②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로 변화시키기 위해, [계시록]에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계시록 2장 13절에, “나는 네가 사는 곳을 알고 있으니, 그곳은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라고
[버가모]를 가리켜, “사탄의 왕자가 있는 곳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중요한 도구였기에,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있는 곳을 가리켜,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왜냐하면, [신전]은 높은 고지의 봉우리에 세워졌거나, 성읍 외곽에 위치해서, 아픈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므로,
의료 기술이 거의 없었던 시대에, 환자들이 신전에 모여들었던 겁니다. 그것은 “치유하는 신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떻게 소개되고 있습니까?
12절에 보면, “ 너는 버가모교회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계2:12)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을 좌우에 날선 검”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버가머 교회가 처한 문제와 관련이 있기에, 이렇게 소개를 하신 거죠.
“좌우의 날선 검”이라면, 우리는 떠오르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이 생각나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양날이 닐 선, 어떤 칼보다도 더 예리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해 냅니다.”(히4:12)
여기서 “좌우에 날이 섰다.”는 표현은 구원(심판)의 말씀이며,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위선과 교만을 찌르며, 거짓을 잘라내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바벨론]의 특징은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서,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리를 왜곡하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무너뜨리는 세력이 항상 존재합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주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말씀의 검]을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 [버거모 교회]를 먼저 칭찬하십니다.
책망할 것이 있는 교회들도 언제나 칭찬을 먼저 하고, 다음에 책망을 하십니다.
모든 상황과 상태를 아시는 주님께서 [책망]보다도 먼저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반복되는 표현이 “내가 안다. 내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주님]은 각 교회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상황을 잘 아시며,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아십니다.
13절의 말씀에, “그러나 너는 내 이름을 굳게 붙잡고,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사탄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계2:13)
내가 살고 있는 곳, [사탄의 왕좌]가 있는 곳,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있는 곳.
[주님]은 “①그곳을 내가 안다. ②그곳에 너희들이 살고 있다.
③그곳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사탄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라“는 걸, ”내가 알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사탄]은 어느 곳이나 다니지만, 특별히 터를 잡고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에 가면 [폭력]이 더 만연하고, 어떤 지역에 가면 [마약]이, 어떤 지역에 가면 [음란]이,
어떤 지역에는 [우상숭배]가 심한 곳이 있는데, 바로 그곳을 전략적으로 공격을 하죠.
그러니까 [버가모] 지역에,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을 만들어서,
전 아시아로 퍼져나가게 하려고 하는 ”그곳에 사는 것을 내가 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곳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환경을 바꾸어 주시지 않고,
”그곳에 살면서 어린 양을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우리가 살 곳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 자신]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곳이, ”사탄의 왕자가 있는 곳“이라도, ”그곳에서 어린 양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곳에서도, [교회]는 존재하고, [교회]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교회]가 충성스럽게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성스러운 믿음에도 불구하고, ”책망 받을 것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것은 ”거짓된 가르침을 지키는 자들“을 용납한 것입니다.
14- 15절에, ”그러나 내가 내게 몇 가지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는 발람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들을 용납하는구나.
발람은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고, 음란한 행위를 하게 했다.
이처럼 네 안에도 니골라 당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계2:14-15)
▶[책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에 나오는 ”발람의 가르침“입니다.
[발람]의 가르침을 따라 가는 이들은 ”바로 니골라 당이다.“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발람]은 구약시대의 사람인데, 지금 이 시대에 ”[니골라 당]의 모습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있었던 [반란의 흐름]이, ”지금의 니골라 당과 같다.”는 것은 [거짓된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거짓된 가르침]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그 자유를 지나치게 확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구원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다.“라고 [믿는 믿음]이 거짓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인이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당시에 황제를 숭배하는 일들에 참여하는 것은
”사회적인 일이고, 일반적이기에, 괜찮다.”고 가르쳤을 겁니다.
마치 우리가 일제강점 시대에, 교단에서 [신사 참배]를 하는 것을
국가적인 의례이기에, “신앙과 관계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를 하면서, 그것을 “합리화하는 수단”이지요.
그러나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들어오니 거짓된 가르침을 용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차가움]은 “열의 부재”이고, [거짓]은 “진리의 부재”입니다.
진리로 충만하지 않을 때, [거짓]은 틈을 타서 나타납니다.
[거짓말]은 “[100%의 거짓]으로는 성립이 안 됩니다.
[거짓]은 항상 어느 정도 [사실]을 포함해야, 사람들이 거짓말에 속거든요.
그러니까 [거짓말]에는 일부 사실을 담고, 일부 거짓을 함께 보탬으로써,
”전체를 거짓으로 만들어버리는“ 속임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는 반드시 ”음란 행위“가 뒤따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합리화하죠.
영화나 드라마에서, [문화]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세상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가장 인식하지 못하는 게 뭘까요? 그것은 [물]인데,
[바벨론]이라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거짓된 물결]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러한 물결이 이제 버가모 교회뿐만 아니라,
다음 주에 살펴볼 [두아디라 교회]도 [이세벨]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들은 핍박과 박해는 순교할 만큼, 충성스러운 믿음을 지켰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가온 유혹에는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험]은 “언제나 뜻밖의 방향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외부의 핍박에는 순교적 태도로 믿음을 지킨 성도들도 ”내적으로 찾아오는 유혹“에는 쉽게 빠져들어,
우상숭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진리의 시험]은 우리가 압박을 견디고, 높이 솟아오른 지점에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받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평범한 시간에 찾아온다.“고 했어요.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이러한 물결을 거스르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어린 양을 바라보고 따르지 않으면, [바벨론의 물결]을 느낄 수가 없이 휩쓸려 가는 거죠.
고향을 찾아,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이 시대를 거스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시대에 거스르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그것은 [회개]이지요.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진 [주님]은 교회의 회개를 명하시며,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16- 17절에, ”그러므로 회개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장 네게로 가서, 내 입에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내가 이기는 사람에게는 감추인 만나를 주고, 그에게 흰 돌과, 그 돌 위에 쓰인 새 이름을 주리니,
받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계2:16-17)
이 말씀은 회개를 명하시며, 또한 승리를 바라보도록 격려하시며 약속을 주십니다.
▶여기서 ”세 가지를 주신다.”고 했는데,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1)첫째로/ “회개하려고 이기는 사람.”에게 감추인 [만나]를 주신다.
이것은 지금 로마 황제 숭배에 참여하는 이 상의 이 세상에 우상의 재물로 가득찬 잔치와 대조되는 감추인 만나
그것은 천상에서 누리는 성찬의 축복을 의미하죠.
이 땅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천상에서 누리게 될 진정한 만나이신 예수님으로
그 어린 양의 잔치에 참여하게 될 그 축복을 약속하신 겁니다.
(2)둘째로/ “회개하려고 이기는 사람.”에게 [흰 돌]을 주십니다.
▶당시에 [흰 돌]은 무슨 의미인가요?
그것은 경기에서 주는 “일종의 트로피와 같은 [상]”으로 표현되었어요.
▶왜, [흰 돌]을 주었을가요?
그 당시에는 [힌 돌]을 구하기가 힘들었을 거니까요.
▶왜, 이렇게 했을까요?
그것은 “장차 어린 양의 천국 잔치에 초대받는 특권”을 약속하신 거죠.
(3)셋째로/ “회개하려고 이기는 사람.”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가져 온 그 [흰 돌]에 [새 이름]이 있어요.
우리 땅에서 우리의 이름은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는 회개하려고 이기는 사람에게 “새 이름을 주신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불리어질 [새 이름]은
“주님과 새로운 관계에서 만나게 될 특권“이고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상의 잔치]가 아닌, [천국의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니까,
①하늘의 [만나]와
②[흰 돌]을 가지고 들어가,
③우리의 [새 이름]으로, 천국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회개]란 “이렇게 좋은 곳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말씀의 검]으로 우리가 날마다 단련할 때,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를 확신하고,
[버가모 교회]가 받았던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받는 ”어린 양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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