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6]/ 사데 교회 (계3: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그 죽음이 석연치 않을 때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부검]을 실시합니다.
[부검]은 시신을 해부하여 죽음의 원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가족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러나 꼭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요즘에,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이 [주님의 말씀]은 당시 “교회를 해부하여 원인을 찾는 [부검]과 같다.”고 느껴집니다.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다섯 번째 교회로 사데 교회] 이야기입니다.
[사대교회]는 내륙으로 깊이 들어와 있고, 산기슭과 강을 따라서 비옥한 골짜기에 위치한 도시였기에,
무역과 교통이 활발한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있던 교회에 주님께서 영적인 부검을 행한 후에. 이렇게 결론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3장 1절의 말씀, “너는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들을 알고 있으니,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구나.”(계3:1)
이 말씀은 매우 호된 책망과 같습니다.
앞서 나온 교회들과 달리, 칭찬이 없이 “너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다.”고 바로 책망부터 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상황과 대상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께서 “부검하신 후에 내리신 진단”입니다.
[사데]라는 도시는 고대에 아주 유명한 도시이고, 아크로폴리스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가장 오래된 건축물은 [아데미 신전]인데, 아테네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의 크기였으니까,
신전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컸다.“고 합니다.
이 도시가 이제는 과거의 유물만 되어 버린 것처럼, 교회도 ”과거의 역사 속에 사라져버린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그 지역의 도시가 가진 명성처럼, [교회]도 살아 있는 것처럼 “이름이 있었으나”,
실상은 “죽어 있다.”는 냉혹한 진단을 내리십니다.
당시에 이 편지가 쓰여 지던 당시의 [사데]는 분명 매우 번성한 도시였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주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버가모 교회]나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거짓 교사에 대한 언급”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중도 많았을 것이고, 모든 면에서 살아 있는 생기가 느껴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제로는 죽어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2007년에, 상암 경기장에서 한국 교회가 [1907년 평양 대회 부흥 운동]을 기념하며, 100주년기념으로 모였는데,
그 자리에서 사랑의 교회 옥한음 목사님이 설교하시기에, 여러 교회들이 힘을 합하여 함께 모였습니다.
그때 옥한음 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한국교회가 원산에서 시작되고, 그리고 평양 대부흥운동, 그리고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진 영적 운동으로,
한반도 방방 곳곳에 예배당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한국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부흥의 놀라운 성장과 더불어서, 교회도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저렇게 모이기를 힘쓰고, 많은 선교사도 파송했으니,
세계 교회가 볼 때는 “한국 교회는 참으로 살아있다.”고 부러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2007년 그 당시에도, 교회가 사회적으로 점점 신뢰받지 못하고, 위선적인 교회가 되고 있다는 평가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사데 교회]가 들었던 ‘주님의 책망을 듣는 시점’이 아닌가?“라는 맥락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설교 제목이 ”주여, 살려 주옵소서. 우리를 살려주옵소서.“라는 제목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4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온누리 교회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으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지난 40년간 우리 [온누리 교회]는 이름이 많이 알려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을 붙잡고, [온누리 교회]를 물어 보면, 평판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에 섰을 때,
우리 [온누리교회]가 ”[사데 교회]가 받았던 책망“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저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가 40주년을 맞이하면서,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와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①[사람의 관점]에서는 ”살아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름은 살아있지만, 실은 ”죽어 있다“는 말씀이고,
②[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에서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요?
생각해 보면, 이 [사데]라는 도시는 다른 도시처럼, 많은 이교 신전들이 있었고, 로마 황제를 숭배하고,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와 같은 그런 상황이 똑같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에 있었던 것이 [사데 교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핍박”인데, 만일 순교가 있었다면 칭찬이 나왔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나 [버가모 교회]는 핍박 속에서 “순교의 영성 헌신”이 있었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책망 받은 부분도 있었고, 거짓된 이들을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한 부정적인 요소도 있었지만,
또한 그들은 핍박에 맞서 [순교의 신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사데 교회]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핍박이 없었고,
핍박이 없는 것은 축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점점 죽어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사데 교회]처럼 되어가는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핍박이 없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어떤 제약도, 불이익도 받지 않고, 안주하는 교회, 겉으로는 예배도 있고, 봉사도 있고,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핍박이 있는 교회들]은 존재감도 없고, 실상은 그 핍박에 눌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살아있는 교회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핍박이 없는 교회]는 모두 죽은 교회가 됩니까?
그렇지는 않죠. 핍박이 없는 지역이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교회로 존재하는 교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작년에 두란노에서 이런 작은 소책자를 냈죠. [텀 레이러]라는 미국의 교회 학자가 “죽은 교회를 부검하다.
또 살아나는 교회를 해부하다.”라는 작은 소책자를 펴냈습니다.
여러 교회들을 이렇게 조사해서 부검이라는 콘셉트를 이용해서 죽어 있는 교회의 공통적인 특징,
또 살아나는 교회에 그렇게 죽었다가 살아나는 교회의 공통 특징 이것을 이제 사회과학적으로 잘 정리하죠.
(1) [죽은 교회]의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10가지인데, 제가 3가지로 요약하면,
①첫째/ 좋았던 과거에 집착해서, 어떤 변화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의 신앙이 좋았을 때는 그 시스템, 그 프로그램에 집착해서,
[과거의 시간]에 고정되어, 변화를 받아 드리지 않아요.
②둘째로/ 내부 지향적으로만 예산을 사용해서, [그들만의 교회]를 추구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이웃을 섬기며 베풀고, 열방을 위해 선교하는 것이 없고,
그저 자끼들 끼리 어울리고, 자신들만을 위해서 예산을 사용하는 교회입니다.
③세 번째는/ 역시 연결되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자신만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면서,
“주님의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은 교회]의 특징은 ”주님의 지상 명령에 대한 설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교회]와 [개인]은
”죽은 교회이거나, 죽은 사람”입니다
(2) 반면에/ [살아있는 교회]의 특징은
①첫째/ 전통을 위한 전통을 내려놓고, “[바른 지표]를 언제나 사용한다.“는 거죠.
[교회]는 얼마나 성도가 많이 모이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교회의 초점]이 항상 ”우리 자신“이 아니라, ”외부로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명령]을 강조하고, ”열방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선교적인 교회]이고,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②둘째로/ 끈질기게, 강하게, 그리고 ”함께 기도로 연합하는 모습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함께 모여 기도“하는 분위기가 있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③세 번째로/ ”아플지라도 연합을 방해하는 독소를 제거한다.”는 거죠.
독이 있는 신앙의 모습을 용납하지 않고, 악하게 분열시키는 패턴을 방치하지 않고, 단호하게 질서를 잡아가야 합니다.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은 죽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데 교회]에 대한 평가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평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말하면,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면, 살아있는 소망보다는 절망이 더 크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름다운 꽃송이를 받게 되면, ”살아있는 꽃이라.“고 향기를 느끼고, 좋아하지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 버리고, 아무리 물을 주어도 시들어 버립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꽃이 아니라, 사실은 죽은 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꽃]과 같이, [우리]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생명은 살아있다고 말하나, 실상은 죽은 생명“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을 ”허물로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했어요.
그것은 ”죽을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뿌리가 끊겨진 생명”은 [죽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입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영원토록 살아 있으신 분,
▶[주님]을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심]이 “그분이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진정 살아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 앞에서도 “진정 나는 살아있는 자.”라는 고백을 예수님만 하시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우리들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 안에 영생이 있기에, ”나는 죽어도 다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①여러분은 ”살아 있으나, 죽어 있는 자입니까?
②아니면, 죽어도 다시 사는 자로서 지금 살아있는 자입니까?
---- 이런 중요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에 죽었으나,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그래서 살아있는 자다 말씀하시는 주님처럼,
“나는 살아있는 자다.”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2절 3절에, “너는 깨어서 죽어가는 남은 것들을 굳건히 하여라.
나는 네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러므로 너는 어떻게 받고 들었는지, 기억해 순종하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이니, 내가 어느 때 네게 올지, 네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계3:2-3)
▶[살아있는 신앙]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①첫 번째 특징은/ [깨어있음](Awakeness)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음]은 ”죽음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생명 없는 자처럼 살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나, 죽어가는 남은 것들을 굳건히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죽음에 휩쓸리는 것들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에 우리의 삶이 소비되는 것,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것, 방종에 빠지는 것, 우리의 신앙과 삶이 불일치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죽음에 휩쓸려 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우리는 살아있는 자들이기에, ”우리의 생명이 죽음을 깨워서, 굳건히 세우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②두 번째 특징은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사데 교회]는 “하나님 앞에 [온전케 된 것]을 찾지 못했다.“고 책망했어요.
▶여기서 [온전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위선]과 [가식]이 없는 진실함입니다.
▶[죽어 있는 신앙]은 어떤 신앙일가요?
언제나 [시선]이 ”하나님의 시선“이 아닌,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가식]을 행합니다.
옛날, [교회의 주보]를 보면, ”헌금자 명단“이 나왔는데, 그 당시에 전산도 없었고,
도중에 사고가 날 수 있기에, ”헌금이 잘 입금되었다.“는 표시로, 영수증처럼 보여준 거예요.
이제는 [온라인]도 되고, 국세청에 [기부금 영수증]도 확인하므로 폐지되었어요.
최근에,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것을 폐지하면, ”헌금이 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런데 결론은 “헌금이 더 늘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진정성] 있게, “하나님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가?”의 차이이고,
“하나님과 나와의 진정성 있는 관계 속에 있어야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③셋째로/ 살아있는 신앙의 세 번째 특징은 [순결](purity)입니다.
[사데 교회]의 죽음은 바로 [더러움]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이세벨]이 드러나지는 않고, 은밀히 숨어 있는 [더러움]이 있었지만,
누룩처럼 조용히 퍼져나갑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겁니다.
4- 5절에, ”그러나 사대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니, 그들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는 사람은 그들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나는 결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계3:4-5)
▶여기서 주님]이 두 가지를 약속하는데, 그 약속은
①첫째 약속은/ [흰옷]을 입을 것이다. [흰색]은 ”흰 돌, 흰 구름“과 같이, 계시록에 자주 나오는데,
”순결의 상징“이며, 또한 ”승리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려면, [순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린 양의 피로 우리의 옷을 희게 씻어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셨다.“는 거죠.
▶여기서 ”흰옷을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어린 양이 통치하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필수품“은 [흰옷]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로움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시는 의로움”입니다.
②두 번째 약속은/ “생명책에서 결코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출애굽기]부터 시작을 해서, [예언서]에도,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적은 책이 있다.“고 했어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이름“은 없기에, [생명책]이라고 불려 집니다.
여기서 [생명책]은 ”교인 등록 명부“가 아닙니다.
[우리 이름]은 ”교인 명부“에는 이름이 있어도, [생명책]에는 이름이 없을 수 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어요.
혹시 [여러분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을까?“를 걱정하는 분이 있는데,
이 말씀은 무서운 말씀이니,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인 명부]가 아니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믿음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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