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8] 라오디게아 교회 (계3:14-22) 2025.02.23

다이나마이트2 2025. 2. 23. 21:12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8] 라오디게아 교회 (계3:14-22)  말씀: 이재훈 목사님
소아시아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나?”에, 기준이 되는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를 평가하는 “주님의 평가 기준”은 [주님과의 관계]이고,
어떤 제도나 규모, 어떤 조직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를 말합니다.
 
①주님을 얼마나 진실하게 [사랑]하는가? 
②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고 있는가?
③어떤 [핍박] 속에도 인내하는가? 
④주님에 대하여 왜곡하는 [거짓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근절시키는가?
⑤다시 오실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는가? 
--- 모든 것이 “주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 없이 “칭찬”만 받았고,
그리고 그 밖의 교회들은 책망과 동시에 칭찬 받았으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없이, 오직 “책망”만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망]을 주시면서도, “교회에 대한 사랑”은 포기하지 않고,
다른 교회들처럼 교훈과 도전과 약속은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먼저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 도시는 계곡으로 형성된 도시로, 리쿠스 강을 따라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14-16절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아멘이시오, 신실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들을 알고 있는데,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바란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니,
내가 너를 내 입에서 뱉어낼 것이다.”(계3:14-16)라고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나요?
① “아멘“이요, ② “신실하고 참된 증인” ③하나님의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이 말씀에서 [아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정“을 표현하는 표현이고,
[아멘]이라는 단어 뒤에 ”충성되고 참되다.“로 연결되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에, 
[예수님], ”그분의 이름이 곧 아멘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며, 
①”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바란다.“
②”네가 이렇게 미지근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으니, 내가 너를 입에서 뱉어낼 것이다.“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핵심]은 ”미지근한 상태“라는 말인데, 어떤 상태인가요?
여러 해석들이 있는데, 먼저 잘못된 해석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①첫 번째는/ [찬 것]을 ”불신의 상태“로 표현하고, [뜨거운 것]을 ”믿음이 좋은 상태“로 해석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그렇게 미지근하게 믿으려,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고 들리게 해석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해석이죠. [불신의 상태]가 어떻게 미지근한 믿음보다 더 좋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표현은 분명히 옳지 않은 해석입니다. 
 
②두 번째 잘못된 해석은 [미지근함]이라는 것을 ”차다. 뜨겁다.“는 모두가 [열정]으로 해석을 해서,
”열정이 식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차다, 뜨겁다.“는 단어가 ”사람의 성격과 열심의 상태를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에서 ”열심을 회복하라.“는 말씀으로만 해석하기도 어렵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부유한 도시였지만, 하나 결핍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물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물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그 당시에 [파이프]가 없었으므로, [수로]를 통해 공급했기에, 오염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가리켜, “미지근한 상태”이고, ▶[미지근함]이란, 무엇입니까? 
[자만]이고, “자기만족에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은 뭡니까?
문 밖에 계신 주님을,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모시는 거예요.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하면서, ”저는 주님을 모셨습니다. 주님을 제 마음에 모셔서, 제가 주님으로 고백하고,
제가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문제]는 주님으로 모셔놓고, ”주님을 다시 내보냈다.“는 거죠.
 
아니/ 집 안에 계시지만, 방 한 칸 드리고, 나오지 못하도록 묶어 놓고, [예배]드리러 갈 때만,
”주님 저하고 같이 가시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 거실도 쓰셔도 좋고, TV도 보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제 방 안에 있는 금고는 절대 열지 마세요.
벽장을 열려고 할 때, 주님, 저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자꾸 이러면 같이 못 삽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문 밖에 두신 사람“이고,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평가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미지근한 물]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①효과 없는 믿음, ②무기력한 믿음, ③병든 믿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온도]를 표현하는 게 아니라, [물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당시에 “라오디게아의 [미지근한 물]이라.“는 표현은 “오염된 물, 더러운 물”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17절 18절의 말씀에서, 그러한 상태를 지적하십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고, 너는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사람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경고한다.
네가 풍족하게 되려면, 내게서 불로 정연한 금을 사거라.
너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않으려면, 흰 옷을 사서 입어라.
네가 보고 싶으면 안약을 사서 네 눈에 발라라.”(계3:17-18)
 
주님은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여기는지?”를 먼저 지적하시고, 주님의 판단과 경고를 말씀해 주십니다.
 
여기서 “나는 부자라,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아니다.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지적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외적으로 잘 갖추어 졌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영적으로는 결핍되어 있다.”고 지적하시니까,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인식하는 것과 주님의 평가”가 정반대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자기만족]이고, “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아니다. 너희는 부족한 것이 많다.”고 지적하십니다.
 
성도들이 “금이 많아, 풍족해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주님은 “금을 사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금]은 “불로 제련한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있는 [금]이 아니라, [하늘의 금], 
“그리스도께로부터 연단된 금을 너희들이 가져야 진짜 부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지금 수치스럽게 벌거벗었으니, 제발 [옷] 좀 입어라. [흰 옷]을 사서 입어라.
또한 “너희들은 실제로 앞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들, 자신들이 자랑하고 있는 그 지역의 특산품들이 너무 풍부했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은 “모두 결핍되어 있다.”고 지적하시는 겁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것은 “성도들의 번영을 꾸짖은 게” 아니라,
“성도들의 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영혼“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단지 ”열심을 내라.“고 적용하면, 안 됩니다.
성도들이 ”[열심]이라”는 부분이 없는 게 아니라, [열심]을 내기 전에,
우선 [자만심]과 자기 만족에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회복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 여러분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이 열심을 내면 어떻게 됩니까?
끔찍한 일이 일어납니다. 
 
▶[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을 심리학적으로 “나르시시즘이라”고 해요.
그것은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이 [열심]을 내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열심이 최우선이 아니고, “올바른 자기 발견”이 중요해요.
 
올바른 자기 발견과 자기의 상태를 알고, 자기의 문제를 알고, 그다음에 열심을 내야 돼요.
올바른 자기 인식이 없는 열심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속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라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여기서 [미지근함]을 잘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효과 없는 믿음 믿는다고 하면서 역사가 없는 믿음, 무기력한 믿음 왜 병든 믿음이 되는가 열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1차적으로 영적 자만에 빠져 있기 때문이 영적 자마는 어떤 영적 수준이 깊이 올라간 사람이 빠지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믿음의 효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는 것”이, 훨씬 나은 거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믿음으로 변화되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럼, “본질적인 믿음은, 뭡니까? 
그것은 “자기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을 회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책망을 통해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격려하시며, ”주님과의 친밀한 교재“로 초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중요한 말씀인데,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이 말씀은 불신자에게보다, 먼저 믿는 성도들(미지근한 상태의 성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 집,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문을 부수고 들어오실 능력이 있으시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인격적인 분입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때로는 ”문을 열어 달라.“고 주님께서 폭풍도 보내고, 비바람도 치게 하시죠.
 
그러나 ”안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말씀”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가가 [윌리암 홀만 헌트]라는 작가가 있는데,
“세상의 빛이라.”는 주제로, 주님이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자기의 마음 밖에 세워두고,
문을 두드리심에도 모셔드리지 않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에요.
 
여전히 [자신의 인생]이 “자기가 주인이라.”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미지근한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 [미지근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만심]과 [자기만족]에 빠진 상태를 말해요.
그것은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는 사람”의 마음이지요.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인 동시에, 예수는 ”우리의 로드“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또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신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은 뭡니까?
그것은 문 밖에 계신 주님을 안으로 들어오시도록 모시는 거예요.
 
내 마음 속의 보좌에,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좌정하시도록 내어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만 모시고, 실제로는 문 밖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이 [미지근한 상태]이므로,
우리의 믿음을 분명하게 행동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