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어린 양을 따르는 일곱교회[7] 빌라델비아 교회 (계3:7~13) 2025.02.16

다이나마이트2 2025. 2. 16. 16:20
어린 양을 따르는 일곱교회[7] 빌라델비아 교회 (계3:7~1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평가는 [주님]께서 내리시는 평가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알려져 있는가?”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와 정반대의 평가”를 내리실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얼마나 알려졌는가?”와 상관없이, 주님의 평가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사데 교회]에 대하여, [주님의 평가]는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는 교회”라고 평가를 받았지만,
“주님은 실상 죽어 있다.“고 평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이 약한 교회“였지만, 
[주님]이 보실 때는 ”결코 약한 교회“가 아니며, 도리어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로 칭찬하셨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일곱 교회 중, [서마나 교회]와 함께 책망이 없이, 칭찬만 들은 두 교회 중 하나입니다.

 

이 지역은 자주 [지진]이 발생하므로, 매우 불안정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에 거주하지 않고, ”주로 시골에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3장 9절에, 빌라델피아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도 사탄의 집단이라.”고 주님께서 평가하셨는데,
▶왜, 유대인의 회당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쫓아냈을까요?
그것은 유대인들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의 회당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일종의 로마 당국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회당에서 성경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믿음도 지키는 모임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자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 믿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한 것이므로, 그것이 핍박의 대상으로 낙인을 찍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육신적인 혈통으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은 거짓된 왜곡이고,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는 창세기 12장에서도, [택하신 목적]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고 했기에, 선택하신 것이죠.
 
그러니까 [육신의 혈통]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고,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도 이런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들이 적은 숫자였기 때문에, 힘이 없어서, 세상적인 힘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연약한 모습으로 인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축출 당함으로, 이제 로마 당국으로부터 더 핍박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것은 이들에게 너무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3장 7절에, “너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이렇게 써라. ‘거룩하고 참되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이가 이렇게 말씀하신다.”(계3:7)
 
▶이 말씀에서 [다윗의 열쇠]란 무엇입니까?
[다윗의 열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완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열쇠]라는 단어는 이사야 22장 22절에, 
”내가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겠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유대 왕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는 표현에서, 
이제 그를 보낸 것인데, 그런 상황을 통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우리가 마치 자신들이 다윗의 집에 열쇠를 가진 것처럼 주장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과 아닌 자들을 그들이 선언하는 것처럼, 권세를 가진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열쇠를 가진 자들이 아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이,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배척받은 이들이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받는다.”는 격려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쫓겨났지만,
[주님]은 그들을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도록, “다윗의 집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말씀이니,
 
“주님이 열어주시면 누구도 닫을 수가 없고, 주님이 닫으시면 누구도 열 수가 없다.”고 하니,
얼마나 큰 격려가 되었겠습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께서, 이제 성도들을 격려하고 칭찬하십니다.
 
8절의 말씀에, “내가 내 행위들을 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을 수가 없다.
이는 네가 힘이 약한 가운데서 내 말을 지키고,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계3:8)
 
빌라델비아 성도들이 유대의 공동체로부터 축출되었을 때, 그들의 인생에 [믿음의 문]이 닫힌 것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열쇠]를 가진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다.”고 말씀하시니,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열린 문]이 무엇일까요?
학자들 간에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①“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다.“는 견해와 
②”새로운 전도의 기회, 사역의 기회“라는 해석입니다.
 
단어 자체가 [열린 문]인데, 두 가지 해석 모두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열린 문]을 새로운 사역이나, 전도의 기회라고 해석하면, 우리에게 적용할 점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인생의 문이 닫혔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고자 하는 상황마다 막다른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자주 합니다.
 
그때, 우리는 눈물 흘리고, 기도를 하면, 바로 그때, 신비로운 것이 나타나는데,
”내 앞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이고, 
또 ”닫힌 문 뒤에 찾아오는 열린 문“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때로 [문]을 닫으심으로써, 새로운 문을 여시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닫으셨다면, 아무리 하소연하고 불평해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다면, 주저하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그 [문]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실 때, 홍해 앞바다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길이 아닙니다. [길]은 원래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갈 수 있는 여러 길이 이미 있었는데, [길]이 아닌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은 앞에는 바닷가, 뒤에는 애굽의 군인들이 따라오고 있었으니, 진퇴양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길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문을 여셨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문을 막으심으로, 새로운 문을 여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막으실 때는, ”더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열쇠를 가지신 분“이 누구인가? [주님]이십니다. 
[막힌 문]으로 무턱대고 들어가려는 것은 무분별한 것이죠.
 
주님께서 그 열쇠로 문을 열어주실 때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문인 줄 알고, 두드리고 있는데, 주님이 닫아놓으신 것에 계속 두드려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은 ”구원의 문“이 되십니다.
[주님]은 목자이며, 동시에 문이 되시는 분입니다.
 
전 인류가 멸망당하는 노아의 홍수 때, 제작한 [방주]에도 문이 하나입니다.
성막에도, 성전에도, [문]이 하나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의 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힘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 살펴본 [사데 교회]에 비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도 작고, 성도의 수도 적고, 또 영향력도 약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이 약하다.”는 것이 사회적인 평가였지만,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결코 약한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약함]은 약점이 아닙니다.
[약함]은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데비아 교회] 성도들은 힘이 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는 칭찬받는 믿음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추방당하고, 로마로부터 핍박받는 시험에 처했지만, 
세상의 힘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칭찬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강점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는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서는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는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면,
①[모세]를 보면, “그가 [부르심]을 받아 쓰임을 받은 것”은 애굽의 왕궁에서 자라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도리어 [궁정에서의 경험]은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교만(혈기)의 원인이었고,
그가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면서,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달았기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신 겁니다.
 
②[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왜 부르셨습니까요?
그의 아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연약함 때문에, 부르셔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주시는
통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③[야곱]의 강점은 ”계산이 빠르다.“는 것인데, 그것을 죄를 범하지만,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약점이었기에, 그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복 강 나루터에서, 그의 환도뼈를 하나님이 위고시키실 때, 그의 강점을 위고시키심으로,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가 되심으로,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하셨죠.
 
④[나오미]라는 여인이 남편과 함께 모압으로 이주하여, 어떤 꿈을 가지고 살았지만,
남편과 두 아들이 모압에서 죽게 되는 상실을 경험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지만. [룻]이라는 자부를 얻음으로, [룻과 보아스]를 통해서
그의 후손을 통해, [다윗]이 태어나는 ”메시아의 족보“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 적으로 [강점]이라.”고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약점]이고, 
“세상 적으로는 [약점]이라.”고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데는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인데, 얼마나 세상 적으로 강점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연약함 가운데 두심으로써, 그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를 약점에서 건져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약점(연약함) 속에서, 인내하며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약함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세 가지 약속은 무엇입니까?
(1)첫째/ 그들의 대 적자들이 그들을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고,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3장 9절 후반부의 말씀에, “보라. 내가 그들로 내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할 것이다.”(계3:9)
 
여기서 “꿇어 엎드리게 한다.”는 것은 굴욕적인 굴복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핍박했던 유대인 회중 가운데서도, “예수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2)두 번째로/ 온 세상에 임한 시험으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10절에, ”네가 내 인내의 말을 지켰으니,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온 세상에 시험이 닥칠 때,
나도 너를 지켜줄 것이다.“(계3:10)
 
지금까지 경험한 시험보다, ”더 큰 시험에 임할 것이라.“는 겁니다.
앞으로는 ”시험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마는
세상에 임할 시험은 ”더 큰 시험“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속한 지역에만 임하는 시험이 아니라, 
온 세상이 시험이 임할 텐데, ”그 시험에서도 너를 지켜줄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때로 지켜 보호하시지만, ”더 큰 시험“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받는 순간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때부터, 거짓과 악과 시험이 다가오면서, 싸움이 시작되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3)셋째로/ 이기는 자를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한다.”고 말씀했습니다.
 
12절의 말씀에, “이기는 사람을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둥으로 삼을 것이니, 그
가 결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내가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할 것이다.”(계3:12)
 
이 말씀이 ▶왜, 빌라델비아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됐겠습니까?
늘 지진으로 요동치는 땅에서, 언제 건물이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것은 좋은 상급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약함 속에서, [믿음의 순례자]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기둥에, 새 이름이 적혀 진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 승리한 교회 이름이죠.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11절의 말씀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내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계3:11)
 
여기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마음을 굳게 잡고, 아무도 내가 가진 [믿음의 축복]을 빼앗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두려움의 소식]으로 들려옵니까? 아니면, [기쁨의 소식]으로 들려옵니까?  
 
우리 모두는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이 [기쁨의 소식]이기를 바라면서, 기대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