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계1:7~2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는 지난주까지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 ①[어린 양]을 따르느냐? ②[용]을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대조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조의 뿌리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 전쟁은 [요한계시록]에서는 여러 상징적인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 선택하는 중에서 소위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린 양]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은 [용]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씀은 요한계시록 17장 14절의 말씀인데,
“그들은 어린 양을 대적해 싸울 것이나, 어린 양이 그들을 이길 것이다.
이는 그가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
곧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충성된 사람들도 이길 것이다.”(계17:14)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에도 [용]이 “어린 양 따르는 이들”을 공격했듯이,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한 공격을 하고 있는데, [시대]는 바뀌었지만, 그 방식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용]은 세 가지 방식으로 [어린 양]을 공격합니다.
①첫째는 쾌락인데, 우리의 즐거움을 도와주는 것처럼 위장하여, [용]을 따르게 합니다.
②두 번째는 “거짓된 가르침”을 통해서 공격합니다.
③세 번째는 “박해를 통해서, 직접 공격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①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쾌락]을 통해,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으며,
②[거짓된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으며,
③정반대로 신앙의 자유가 없는 지역은 [박해]를 통해서, 공격합니다.
이러한 모든 공격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고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요한계시록 1장 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①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계시”이니까, “그분에 대한 계시”라는 의미이고,
②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계시”라고도 해석이 됩니다.
- 두 가지 모두 다 중요한데, “예수님에 대한 책”이기도 하며,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기도 한 책”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어가면서 [예수님], 그분께 초점을 맞추기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 표현들”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상징의 표현]이 “어떤 사건, 무엇을 가리키느냐?”를 붙잡다가, 정작 중요한 [예수님]을 놓치기 쉽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어린 양”이십니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 당하신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입니다.
▶다 오실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①“동물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처럼,
②“왕으로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장 7절에, ”보십시오. 그분이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 각 사람의 눈이 그분을 볼 것이며, 그분을 찔렀던 사람들도 볼 것이며, 땅의 모든 민족이 그분으로 인해 통곡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계1:7)
여기서 ”보십시오.“라는 말은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 분명 확실하다.”는 말씀이고,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라고 말씀했는데,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구름과 함께 오신다,”입니다.
여기서 [구름]은 “예수님이 발을 딛는 도구”라는 뜻이 아니라, “구름과 함께 승천하신 것”이고,
“구름과 함께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성경에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환상 가운데 발견한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첫째로/ 영광스럽게 되신 분입니다. 구름과 함께 다시 오실 주님을 [요한]은
“주의 날에 성령에 사로잡혀 환상 가운데 보게 됩니다.
①그 분의 모습은 [옷]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옷]은 ”그분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제사장]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역할을 하는데, 제사장은 문을 열어 주는 역할입니다.
②그분의 [머리와 머리칼]은 ”흰 양털과 눈처럼 희다.“고 했고,
③[눈]은 ”타오르는 불과 같다.“고 했는데, 우리 안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다 태우시고,
정결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④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제련된 청동과 같다.“고 했는데,
[청동]은 철과 구리를 합친 것으로, [철]은 강하지만, 녹이 쓰는 약점이 있고, [구리]는 녹슬지 않지만, 유연하니까,
이 두 가지를 합쳐 [청동]으로 만들어, [주님의 발]을 아주 견고하고 단단하다.”는 말씀입니다.
⑤이제 [입]에 대한 말씀으로, “좌우에 날이 선 [검]이라.“고 표현합니다.
[주님]은 [칼]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 아니라, ”칼과 같은 말씀“을 가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권력은 무력으로 제압하지만,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의 힘은 바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모습을 [환상] 가운데, 보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이것을 보았을 때, [요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성도들의 소식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몸은 약해져 있고, 갇혀 있으니,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의 눈]을 보았고, 견고한 [주님의 발]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음성도 잘 나오지 않는 연약한 몸이지만, 세상을 통치하시고 호령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의 날선 검과 같은 말씀“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1차적으로 [요한]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머리부터 발까지,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하나하나가 자신을 일으키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죠.
그래서 [요한]은 압도되어서, 그분의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엎드려졌다.“고 했습니다.
두려웠으나,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일까요?
(2)둘째로/ [그 영광스러운 주님]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모든 시대의 주권자”이고, [주인]이십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주님]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표현을 사용했는데,
①알파와 오메가, ②처음과 마지막, ③그리고 “시작과 끝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끝]도 같은 맥락이죠.
이것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설명하기 위해, 여러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의 시작이고, 마지막이신 분이고, 역사의 통치자이고,
주권자는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4장 6절의 말씀에, “이스라엘의 왕이요, 이스라엘의 구세주이신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이 없다.”(사 44:6)의 기록입니다.
바벨론의 모든 우상들에 대항하면서,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분이시며,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오늘 이 시대에도 이런 [역사의식]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3)세 번째로/ 그 영광스러운 분은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영원토록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다시 오실 주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실 분이십니다.
계시록 전체에서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계시고, [이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분이라.”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①[지금]과 ②[이전]과 ③[나중], 이것은 ①[현재]와 ②[과거]와 ③[미래]
중요한 공통점은 이렇게 [시제]를 사용할 때, 언제나 “지금부터 시작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세계의 시대를 사용할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①[과거], ②[현재], ③[미래]로 나누어, 우리는 늘 이렇게 표현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표현 방식이, [현재]부터 시작해서, [현재 과거 미래]로 나갑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현재]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에는 언제나 현재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 안에는 “현재만 있을 뿐”이에요.
이것이 영원과 시간이 다른 점입니다.
여러분, [영원]은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늘 흐릅니다.
[내일]은 “또 다시 오늘”이 되고, “또 그다음은 또 오늘”이 되고,
오늘은 이제 과거가 되고,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것이 시간이라면,
[영원]은 “언제나 현재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현재]시고, 우리의 미래도 [현재]시고, 우리 현재는 당연히 [현재]시고,
우리의 과거도 우리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우리의 과거도 [현재]시고, 우리의 미래도 [현재]라는 거예요.
더 이상 저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영원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를 이쪽 방향으로 보면, 모든 게 “이렇게 현재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언제나 현재이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신 “영원하신 분“입니다ㅣ.
요한계시록 1장 18절에, ”나는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으나 보라.
나는 영원토록 살아있는 자니, 나는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인류가 지배하지 못한 유일한 한 가지가 [죽음]입니다.
과학 기술을 가지고, 세상을 바꾼다고 하지만, 또 수명도 연장시키지만, [죽음의 열쇠]는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과학 기술과 생명공학이 발전하면, 죽음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결코 죽음의 열쇠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죽음의 열쇠]는 ”주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니까,
[인간]은 죽음을 정복하려고 하지 말고, ”열쇠를 가지신 분“에게 따라가야 합니다.
[죽음의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따르는 것이 죽음을 벗어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계1:7~-20)
이것은 아주 놀라운 비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어린 양 되신 주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환상]을 보기 전에, [요한]은 홀로 유배되어 공동체와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일곱 교회는 점점 침체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의 환상]을 보고, [요한]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사역자]가 되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교회를 일깨웠습니다.
세상에 있는 제국들은 모두 다 무너질 것이지만, 어린 양을 따르는 제국은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세상의 제국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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