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 (계14:1~5) 2025.01.05

다이나마이트2 2025. 1. 5. 19:49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 (계14: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한계시록 1장 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역사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역사 전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왜, 예수님께서 역사의 중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목할 것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예수님,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주로 “[어린 양]”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입니다. 
 
▶[요한]이 쓴 [요한계시록]을 간단히 정리하면, 
①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②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심으로써, 
③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장 1절을 보면, 
“또 나는 보았습니다. 이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만 4천 명이 서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나온 [시온산]은 “어린 양의 임재”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또 [14만 4천]은 문자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숫자”가 아닙니다.
일부 [이단]에서 “14만 4천 명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된 주장입니다.
 
▶[14만 4천명]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표현하는 숫자이고, 
이것은 “하늘에 승리한 교회 공동체”를 의미하고, 
“어린 양과 함께 사단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공동체, 성도들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1절의 후반부에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계 14: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이름이 쓰여져 있다.”는 것은 [소속]을 의미하고,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어린 양] 때문이고, 그리고 어린 양의 아버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어린 양의 은혜]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어린 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함께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린 양이신 분이 바로 하나님과 동격이신 분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 인격으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임을 말씀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이 어린 양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함께 통치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하늘의 열린 문으로 바라본 세상은 이 “어린 양의 보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6절에, [어린 양의 정체]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내게 말했습니다. 울지 마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했으니,
그 책과 그 일곱 인을 열 것이다. 또 나는 보좌와 내 생물들과 장로들 가운데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죽임을 당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가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5:5-6)
 
여기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그 [어린 양]의 정체는 “유다 지파의 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실상은 [사자](동물의 왕인 사자)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일곱 뿔]은 “완전한 능력”을 의미하고, [일곱 눈]은 “완전한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능력“과 ”완전한 지혜“를 가지신 [사자]이신 그분이,
”어린 양으로서 죽임 당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자]처럼 강한 존재가 연약한 존재로 죽임을 당합니까?
(사자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 어찌하여 어린 양처럼 희생을 당합니까?
그것은 완전한 능력과 완전한 지혜로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것이 ”어린 양이 곧 승리자이고, 통치하시는 주님의 생각“인 것이죠.
그러므로 [사자]를 보려는 이들은, 먼저 [어린 양]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그분은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때는 [사자]로서 오실 것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다시 오시게 되면, [사자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처음 오심]과 [다시 오심]을 구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현상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현재]는 ”사자의 영광“이 가리워져 있지만,
①우리는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볼 수 있고, 
②복음 안에서만 그것이 가능 하고, 
③성령 안에서만 그 영광을 볼 수 있지만, 
▶[다시 오실 때]는 ”그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크리스천 문학가인 [CS루이스]가 “나니아 연대“라는 시리즈가 있는데,
그 [책]은 ”성경적인 세계관“을 잘 담고 있는 책으로 유명합니다.
 
여기에 핵심은 ”사자 [아슬라]가 [에드몬드]를 구하기 위해, 자진하여 어린 양처럼 마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죽임 당함으로써 [아슬라]는 승리하였고, [나니아]는 세계의 주권을 마녀에게서 다시 빼앗아,
참되고 의로운 통치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자]는 자신의 힘으로 마녀를 이기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여 죽음으로써, 마녀를 이기고, 그리고 구한 것입니다.
 
이 [스토리]는 분명 사자이신 주님이 어린 양으로 자신을 희생함으로, ”우리를 구하시고,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한다.“는 모티브를 가져가서 어린이들에게 동화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고, 
 
실제 [루이스]가 이런 동화들을 쓴 이유는 ”성경의 이야기와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구속받은 성도들은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14장 4절의 후반부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로 사람들 가운데 구속함을 받았습니다.“(계14:4)
 
여기에, 어린 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저희들)의 정체성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내 아이들이 이제 [아슬란]을 따라 마녀와 싸우고,
하나님 나라의 전사로서 함께 싸웠던 것처럼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들의 모습]을 세 가지로 표현합니다.
(1)첫째로, 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새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구속받은 사람들로,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 노래는 마치 하늘로부터 오는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천둥 소리 같은 소리, 하프 켜는 소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들이 모든 시대에
구속받은 모든 이들로부터 나오는 노래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큰 소리죠.
 
세상의 모든 노래는 슬퍼하는 노래이고, 한탄하는 노래이지만,
[새 노래]는 하나님의 왕권,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것을 기뻐하는 겁니다.
 
여기서 [새 노래]는 “새로 작곡한 노래”가 아니라, 
“구속받은 영혼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된 노래”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늘에서만 불려질 노래가 아니라, 이 땅에서도 불려질 노래입니다.
 
(2)둘째로/ 그들은 “흠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흠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①“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큰 무리입니다.
②그들은 “의롭게 된 죄인들”이고, “믿음으로 어린 양의 의로움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③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옷 입고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④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⑤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법적으로 죄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정결하게 우리를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 없는 사람”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이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정결해야 합니다. 신랑과 연합함에 있어서, “정절을 지킨 자”이어야 합니다.
 
(3)셋째로/ 어린 양을 따르는 이들은 ”죽기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의 인내,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죽기까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
이들은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쓰여 질 당시에, 로마는 ”황제를 주님으로 모시도록 요구받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에, 그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많은 성도들이 죽임 당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어린 양을 따랐습니다.
 
악한 권력이 지배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들은 어린 양을 따르기에 믿음으로 인내하며 충성했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안식의 상“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십자가의 죽음까지 인내하심으로 부활을 맞이하신 것처럼,
핍박 아래 죽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도 영광스러운 부활로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왜, [요한]을 통해, 이런 계시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고난을 피할 길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끝까지 인내하며, 예비된 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9절에서도 요한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자신을 표현할 때 여러분의 형제이며 예수 안에서 환란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 때문에 반모 섬에 있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환란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겁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나는 환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도리어 참된 자녀임을 증거하는 표시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참여하게 될 이 영광,
그 소망을 우리에게 더욱 가득 채우기 위해서 때로 고난을 허용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어린 양을 따르는 삶은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순풍에 돗을 단 항해가 아닙니다.
어떠한 고난에도 인내로 헤쳐 나가며, “승리하는 영광을 맛보는 삶”인 것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난에 대한 해결책은 
그것은 고난을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인내로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어던 곳입니까?
①“어린 양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②어린 양처럼 죽임 당하심으로, “그 승리를 함께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고,
③[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죽기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④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는 이들입니다.
⑤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로 흩어진 선교사님들을 생각하고, 후원하는 장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 노래를 부르며,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며, 죽기까지 인내하고, 
믿음의 싸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온누리교회는 언제나 “어린 양을 따른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