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서로 발을 씻기라 (요13:12-17) 2023.01.05

다이나마이트2 2023. 1. 5. 20:29

2023 새벽기도[25일차] 서로 발을 씻기라 (요13:12-1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우리는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선교 사역자의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매일매일 이른 새벽에 그들의 [간증]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①다원화된 한국 사회 속에서 “예수님이 길 진리 생명이심”을 확인하고, 
②우리가 “어떻게 전하는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을 하게 되고,
③우리가 “선교사님들을 어떻게 중보 해야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내용이지만,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신 사건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세족식]이라는 프로그램이 실행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대야를 들고 전 세계를 다니며 전도하는 분도 계시고,
아버지 학교에서는 졸업식 전에 아내들의 발을 남편들이 씻어주는 체험을 하고,
저희 교회의 장로 장립식 때는  피택 받은 분들의 발을 씻어주는 [의식]을 행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식]을 행하는 것은 자신의 발을 씻기도 불편하지만,
“누군가의 더러운 발을 씻어준다.”는 것이 “강력한 영적인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히 [행사나 의식]이 아니고, 
또 어떤 [섬김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남의 발을 씻겨 준다.”는 것은 [섬김]의 대표적인 모습이지만, 
우리 자신도 하기 싫은 영역이지만, “그래도 [사랑의 마음]으로 함께 씻어 준다.“는 것은 영적인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발을 씻지 않은 상태로 ”저녁 만찬의 자리“에 와 앉았습니다. 
제자들은 여러 가지 갈등 문제로 ”누구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유는 뭘까요? 간단하죠.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비포장도로이고, 샌달을 신고 다니므로 발이 더러웠고,
냄새가 났기 때문에, 누구나 집안으로 들어 올 때는 발을 씻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씻지 않고 식사한다,”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입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를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3절에서, 그 의미와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됐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13:1)
 
①첫 번째 예수님께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갈 때가 되셨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여기서 [때]라는 것은 예수님이 장차 감당하실 “[십자가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때“를 말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시간“을 의미하고, ”그 [때]를 아신 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②두 번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배경이 관련이 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사랑]은 땅 끝까지 이르는 사랑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삶의 아픔과,
죄와 허물까지도 사랑하고, 회복시키시는 사랑이라.”는 것이고,
그 사랑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는 겁니다. 
 
이어서 2절에 보면, 또 다른 배경이 나옵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마귀는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배반할 생각을 넣었습니다.”(요13:2)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마음속에 넣어 주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먼저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이며, 어떤 근거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만찬하시는 중에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미리 말씀하셨고,
그러다가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인가?“를 궁금해 했을 때, ”예수님이 떡을 
넣어주는 자가 나를 밟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당시에 팔레스타인 문화 중에서, 만찬 도중에 초대를 받은 손님 중에서,
가장 중요한 손님에게 ”먼저 빵 한 조각을 먹여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을 배반할 [가룟 유다]에게 최고의 귀빈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조롱이나 멸시가 아니라, ”자신을 배반할 제자까지도 사랑한다.“는 모습을 나타내신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발을 먼저 씻어주셨을까요? 
당연히 [가룟 유다]의 발을 먼저 씻겨 주셨고, 그다음에 자신을 의심하는 [도마]의 발까지,
그리고 장차 예수님을 부인할 [베드로]까지 예수님은 다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고, 자신을 배반할 대상까지 사랑하시는 게, [예수님의 마음] 이십니다.
 
▶왜, [사단]이 그런 ”배반할 생각“을 넣어 주었을까요?
3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주셨으며,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아시고는“(요13:3)이라는 말씀에서
 
여기서 [안다]는 단어가 나오는데, 1절에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있다는 걸 아신다.“는 구절이 나오고,
또 3절에도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자신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기 손에 주셨다.“는 것은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아셨다”는 것이고, 
“이제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를 아시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아셨다.”는 말씀이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므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은 단지 더럽기 때문만이 아니고, 
우리가 ”장차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본]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 의미가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더 자세히 나타났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고,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고,
창조주이신 그분이 피조물의 발을 씻어주시는 의미를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6절에서 [베드로]가 “주여, 제 발도 씻겨 주려 하십니까?”라고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 그러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겨 주지 못하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모르고,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은 충성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좌충우돌하는 모습이고, 
사양하면서 겸손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겸손처럼 보이는 교만“입니다.
 
[베드로]는 ”씻어주심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이니까,
예수님이 ”내가 너를 씻겨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니까,
그 때서야 [베드로]가 충격을 받아서, ”그렇다면, 주여, 제 발뿐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①[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흥분하여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치는 사건을 보면,
”[베드로]는 굉장히 다혈질인 것“을 발견합니다.
 
②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에게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을 때,
“왜, [비교급]으로 사랑을 확인했겠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의 의식] 속에는 “늘 자신이 제일 먼저 사랑하고, 제일 많이 사랑한다.“는 그런 의식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항상 다른 제자들보다도 앞서기를 원했고, 또 ”앞서고 있다.“고 생각하고,
”누구보다도 더 많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①첫째로, “십자가에서 [죄]를 씻어 내는 섬김”을 의미하고, 
②더러운 [죄]를 씻겨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③예수님은 배반한 ”유다의 죄까지 용서해 주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배반한 유다의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사랑으로
“자신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는 “교회의 본질”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씻김의 은혜”를 받는 곳이므로, “우리가 앞장서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행하기 위해서 조직된 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회비를 내서 운영하는 단체도 아니고, 사회사업을 하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씻겨주시는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이는 단체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듯이, ”이제는 서로의 발을 씻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사람들에게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을 하려면, 적어도 “예수님의 발 씻음”과 같이,
“[죄 씻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디도서 3장 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는 우리의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 때문이다. 그분은 거듭나게 씻어주시고,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인해 구원하셨다.”(딛3:5)
 
예수님의 “씻어주심“은 [성령님의 은혜]로 ”우리를 씻어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씻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베풀 때, [물]로 세례를 주는 겁니다.
그 때,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가 씻김을 받았다.“는 의미이고,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씻김으로 인해, 완전한 죽음을 경험하게 되고,
”다시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제 발을 씻기지 못합니다.”라고 거부하는 것은
“저는 십자가의 은혜는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사양하지 말고,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는 맨날 교리적으로 십자가 구속에 대한 얘기만 하고, 세상을 섬기는 게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은 교회를 잘 모르고 하는 말 이예요.
 
[교회]가 “세상을 섬기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교회]는 세상에 어떤 사업가보다도 더 많은 사회사업을 하고 있으며, 많은 섬김을 통해서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서로 발을 씻기라”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으로,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서로가 헌신하는 경험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씻어주셨으니, [당신도] 그 복음 안에서, “죄 씻음을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우리가 [베드로의 입장]이 되면, “제 발은 씻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제 발은 제가 씻을 테니,”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신 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죄 씻음]을 받지 않으면, “아무 상관이 없는 교회”가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시대에 [교회의 위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교회”로 흘러가면 절대로 안 됩니다.
 
요즘에 [교회]는 “사회화“되어, 많은 일을 하는 것 같지만,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사람들도 버린 [나환자]들을 찾아가서 돌보고 있습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이 소록도에서 한샘병 환자들을 섬기며, 나환자들의 발을 씻어주고,
때로는 고름을 빼내서 치유하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누구의 발을 씻어야 되느냐?“를 생각하며, 이것을 구호에 그쳐선 안 됩니다.
말로 외치고 나면, 금방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이 [자신의 의]를 마음에만 새기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십시오.
그것은 ”가려서 하는 섬김”이 아니고, “드러내는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씻음을 경험한 사람”이 진정 서로 발도 씻어 줄 수 있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이니까, 우리의 [작은 섬김]이 십자가의 은혜가 되어,
나를 통해서 흘러가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