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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심야예배 세째날 (2016.3.23)

다이나마이트2 2016. 3. 23. 23:38

 

 2016년 3월 23일 고난주간 심야예배 세번째 예배가 양재 사랑홀에서 있었다.

 

 사랑홀 로비 회개의 십자가에는 매일 회개의 제목들이 늘어가고 있다.

 

 8시 50분 ORGANIST 김은영 성도의 오르간 연주가 시작 되었다.

O Welt, ich muss dich Iassen (이곳을 떠나 아버지의 나라로 가오니), 갈보리산 위에

찬송가가 연주 되었다.

 

 도곡 챔버팀의 오프닝 연주가 있었다.

무엇이 변치 않아 (십자가) 가 연주 되었다.

 

 이상진 목사와 주 경배 찬양사역팀의 찬양 인도로 찬양을 드렸다.

갈보리산 위에,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 하나님 어린 양 이런 3곡의 찬양을 드렸다.

 

 대표기도 황의서 장로님

 

 주 경배 찬양 시역팀 남창윤 성가사 특순

바라 보라 주님 지신 저 십자가 찬양을 드렸다.

이 찬양은 민요풍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과 찬송가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라는 곡을 혼합한 곡이다

 

찬양 가사도 참 은혜로워서 찾아서 기록해 본다.

바라보라 주님 지신 저 십자가를 바라보라 주 흘리시는 피와 땅방울 가시 면류관 쓰시고 온갖 조롱을 당하셨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 고난을 당하셨네

골고다 언덕 내 아버지 걸어가시네 한걸음 걸음 고난의 길을 나 위해 걸으시네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우리 대신 죽임을 당했네 구주 예수 영원한 구원의 소망 경배하며 겸손히 절하세

바라보라 주 얼굴의 그 상처들을 기억하라 주 우릴 위해 눈물 흘리심을

골고다 언덕 내 아버지 걸어가시네 한걸음 걸음 고난의 길을 날 위해 걸으시네

찬양하라 우리 죄 지신 예수 그의 사랑 한 없이 크셔라 구주 예수 세상을 이기시고 영광 중에 또 다시 오시리

영광 영광 중에 주 예수 주 예수 또 다시 오시리 찬양하라 찬양하라 찬양 주님을 찬양하라

성시교독 교독문 (고난주간1) 김소리 목사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아멘.

 

침묵 기도 시간이 있었다.

사랑의 하나님

죄악으로 가득한 인생임을 고백합니다.

내 안을 들여다 보고 또 드려다 볼수록 추하고 더러운 죄악이 가득함을 고백합니다.

죄악으로 인해 무뎌지고 무감각해진 내 인생 사랑을 부어 주셔서 용서하여 주옵소서.

메마르고 메마른 내 영혼 가운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기를 원합니다.

회복되길 원합니다. 깨어나길 원합니다. 정결케되길 원합니다.

병들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성경봉독  이사야 53:1~6

 

 이재훈 목사님 강사 소개

세상에서는 고난이 오면 도피하고 피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랑 때문에 고난의 길을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어제는 이 시대에 목사다운 목사님 산마루교회 이주연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셨고

오늘은  교수다운 교수님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이한영 교수님이십니다.

고난의 신비를 직접 체험하신 분으로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고 십자가를 전하는 목사

의학을 공부한 의사로서 암전문의로 또 신학으로 부름받아 목사로 교수로 섬기고 계시고

제3세계의 많은 유학생들을 훈련시키고 또 현지의 선교사로 파송 시키는 사역을 감당하시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 님이십니다.

 

 말씀 선포 '고난의 공감' 이한영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인생은 고난이다.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의 연속이다.

피해갈 수 없는 고난을 유기적으로 잘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는 것이 신비이다.

신비라는 말은 합리적인 이유와 합당한 논리적인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본문은 지금부터 약 2,740년경 주전 740년부터 693년까지

약47년동안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던 이아야가 감당했던 본문 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분단된 상황에서 남유다에서 사역했던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6장에 보면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얼마나 부정한지 보게 되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한다. 자기 부정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6:8 내가 주의 목소리를 들은 즉...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있나이다.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영광스러웠든지 이렇게 대답함.

사6:9-10 그래 가거라 가서 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하고 그 귀가 막히고...  

왕과 백성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라는 말씀이다.

소명은 영광스럽지만 사역은 고난이다.  

 

이사야는 개인적인 사역 속에서도 갖은 고난과 역경을 격게 된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게 되었고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던 선지자이다. 고난의 선지자이다.

이사야는 두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조국의 멸망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첫째 아들은 '스알야숩'인데 '남은자들이 돌아 오리라' 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물론 희망을 의미하기도하지만 전체 문맥으로 보면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가 멸망 할 것이다는 뜻이고

둘째 아들은 '마헬살랄하스바스'인데 '신속히 약탈될 것이다, 노략이 빨리 행해진다'는 의미이다.

남 유다도 또한 신속히 멸망하고 약탈 당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고대 근동의 아들은 매우 중요하다. 아들을 얻는 것은 매우 기쁜일인데 

이 두 아들의 이름을 절망을 상기하는 의미로 지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비극이다.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민족의 패망과 비극을 예고하는 의미를 부르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기 보다는 왕들과 백성들을 향하여 패망하고 멸망 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만하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고 인기없는 선지자이다.

이사야는 노후에 므낫세 왕의 핍박을 받아 반토막으로 잘려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인류가 부러워 할 만한 삶을 산 자의 삶이 아니다.

이사야의 선지자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주여 나를 보내소서 헌신을 했지만 아들들의 이름을 저주라고 부르고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노후에는 반토막으로 잘려 죽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런데 왜?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사야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는가?

왜 헨델의 메시야를 들으면서 기립박수를 하게 되는가?

이것은 신비입니다.  

 

이사야서는 복잡한 문학 신학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이사야서는 전체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39장은 영적인 부패와 강퍅해진 타락상을 나타내고 간절한 회개의 촉구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44장~66장은 남은자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구원의 소망의 메세지이다.

앞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뒤 부분의 소망과 그리스도의 소망, 메시야의 소망을 나타낸다.

특히 63장~66장은 메시야의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바라보면서 소망가운데 시련을 인내하고 있다.

'이사야'라는 이름의 뜻은 원래 '여호와의 구원'이라는 뜻이다.

이사야서를 읽다 보면 이해하기 힘든 난제가 있다.

절망스런 이스라엘과 고통가운데 있는 이사야가 간절히 바라는 메시야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고통받는 고난의 종으로 묘사되고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소망과 구원의 메시야가 44-54장까지 초라하고 나약한 종의 모습으로 계시되고 있다.

나도 힘들어 죽겠는데 나를 구원해야 할 메시야는 나 보다 더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41~53장까지 미래의 메시야를 '에벳' 17번이나 종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난의 종'으로 묘사한다.

특히 52:13~53:12까지 종의 고통적인 모습, 고난이 묘사되이 있다.

52:14 그의 모습이 상하였다. 얼굴이 형채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손상됐다는 의미이다.

53:2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 예수님은 못생기셨다.

53:3 멸시를 받았고, 버림받아, 간고를 많이 격었고, 질고를 아는자이다.

53:5 찔렸고, 상했고, 징계를 받았고, 채찍에 맞았다.

53:7 곤욕을 당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의 모습이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그분 vs 우리라는 대명사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를 구속하신 그 분은 우리가 보기에도 흠모할 것이 없도다.(2)

구원자의 모습이 구원을 받아야 할 나 보다 더 형편없이 힘든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3)

우리는 생각하기를 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한다 생각했다.(4) 비참하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다.

이런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세상 사람들은 '너 나 잘 하세요' 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마27:39에도 보면 서기관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머리를 흔들며 모욕하며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한다.

너나 잘 하세요. 라고 비난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대속적인 죽음이다라고 지적으로 이해를 한다.

그러나 관념적이고 지적인 이해에 앞서서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것에 앞서서

왜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을까? 왜 그런 모습으로 오셔야 하는가?

고난 받고 있는 우리와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고난을 아시고 우리와 함께 고난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높은 보좌에서 초능력적으로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자리까지 내려 오셔서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시고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고난의 공감보다 섬김보다 정답을 주려 하심이다.

눅18장에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왜 병자를 고치는가? 예수님께 질문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 것은 정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18년 동안 병든 여인의 아픔을 공감하신다.

정답 이전에 여인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세상에서는 정답을 가지고 싸운다. 부부 싸움도 정답의 싸움이다.

정답이 정답이 아니라 공감이 정답이다.

 

이사야가 본 메시야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아니라 공감하시는 종의 모습이다.

우리와 함께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다.

빌립보서 2장 5-8절에도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말씀하신다.

성경은 고난을 미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답 보다는 우리의 태도가 어떻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물론 아프다, 절망한다, 탓도 한다. 그러나 그 반응을 넘어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난의 신비에 동참하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의 고난을 넘어서 고난 받고 있는 이웃의 고난에 공감하고 또 그들을 섬길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난의 신비이다.

고난 주간에 금식하지 말고 장사 안 되는 음식점에 찾아 다니며 식사해 줘라.

이것이 공감이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감하시고 같이 고난 받으신 하나님

고난 받을 때 주님이 함께 고난을 받으시고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인생되게 하옵소서. 아멘.

 

 합심기도

 

 봉헌찬양

 

 축복기도 이상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