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40일 특새[26] 버려짐 속에서 이루신 구원 (마27:45~54) 말씀: 이서진, 길혜영 목사
오늘 말씀은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당근마켓]을 아십니까? 이것은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애플리케이션이죠.
저는 물건을 중고로 저렴하게 사거나, 저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판매할 때 사용합니다.
[당근마켓]은 ”당신 근처에 마켓이 있다.“는 뜻인데,
저는 ”당신 근처에 늘 온누리 교인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게 되었어요.
아이들이 자라면서 장난감을 장터에 내놓기 위해, 구매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이 ”혹시 온누리 교회 목사님 아니세요?“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저의 표정과 말투가 급속히 바뀌기 시작했고,
그래서 [판매]하겠다는 물건은 그냥 [나눔]으로 드리기로 했어요.
이제 돌아서려고 하는데, 본인이 양재 온누리 교회 성도님이라.”고, 잠깐 기도해 달라.“고 해서,
[당근]하러 갔다가, [심방]하고 왔어요.
이것은 보람 있는 시간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목회자로서 [영적인 부담감]을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런 [영적인 부담감]을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크리스천이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나의 신앙생활에 대한 [기대감]”이 나타나서, 우리는 [영적인 부담감]을 느낍니다.
오늘은 역사상 가장 무거웠던 [영적인 부담감]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통해,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어떤 분들은 ①”구약 시대에는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을 받고,
②[율법]을 지킴으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다가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일 뿐, 그것이 실체의 형상 그 자체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해마다 끊이지 않고 드리는 똑같은 제사들을 통해,
나아오는 사람들을 결코 온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이 말씀은 [황소나 염소의 피]가 ”[죄]를 제거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동물로 “제사를 드린다.”고, [사람의 죄]가 없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제물을 통해 제사를 드리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마치 “[신용카드]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용카드]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실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는 ①[신용]을 담보하고, ②[약속]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용과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①개인은 파산하게 되고, ②회사는 부도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용카드]의 본질이 [약속]에 있는 것처럼,
[제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는 “약속에 의거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주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모든 죄를 덮어주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구약 시대로부터 계속된 [인류의 죗값]으로,
어마어마한 “영적인 책임감”에 짓눌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시험]에 드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 달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해서 “버림받기”로 작정하고,
끝내 [십자가]에 돌아가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죄인]인 우리를 선택하기 위해,
“의로우신 예수님을 버림”으로, 모든 약속을 지키게 되셨습니다.
그 장면을 오늘 본문에서 보시길 원합니다. 45- 46절의 말씀에,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이 어둠으로 뒤덮였습니다.
오후 3시쯤 돼, 예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이것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마27:45-46)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호소합니다.
이 말씀은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밝아야 하는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대낮인데도,
“온 땅과 하늘이 어둠에 뒤덮이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슬픔과 고통으로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다.”고 착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것”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버림을 받을 수 있다.”고 속삭이는 사탄의 거짓말은 근거가 없습니다.
이 시간에/ 정죄감과 실패감에 휩싸이는 성도들을 위해 선포합니다.
이런 속임수, [정죄감과 거짓]으로 겁박하는 악의 세력은 물러가게 될지어다.
저는 “버림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는 청년들과 공산 국가로 [아웃 리치]를 다녀왔는데, 그 나라는 선교를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엄청난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배드리는 공간에, 공안과 경찰이 급습하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해산시키고, 집주인과 청년들을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은 “선교사님과 현직 크리스천 리더들의 안전”입니다.
그래서 쪽문과 창문으로 선교사님들을 피신시켰고, 십자가와 성경이 압수되지 않도록,
[십자가]는 부숴서 창밖으로 버렸고, [성경책]은 재빨리 찢어서 화장실 변기에 버렸어요.
그날 밤은 모든 상황이 안전하게 지나갔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부수고, [성경책]을 찢었다.”는 죄책감에,
심한 괴로움에 짓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한 문학 작품이 기억나게 해 주셨는데,
그것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입니다.
이것은 17세기 일본 선교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인데,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가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무사들에게 적발이 됩니다.
[무사]들은 복음 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로드리고]가 배교하게 종용합니다.
①외국인이던 포르투갈 선교사 [로드리고]의 목을 베는 대신에,
②그가 전도한 성도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목을 베고 고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을 살리고 싶거든, ”배교를 하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선교사]는 ①성도들이 죽든지? ②예수님을 배교하든지? 두 가지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이 끔찍한 [선택지] 앞에서 고뇌하고 고뇌하다가, 성도들을 살리기 위해서,
동판에 새겨진 주님의 얼굴을 밟기로 결정을 하고, 그가 동판을 밟으려고 할 때,
”밟아라.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성도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모욕해야 했던 [선교사의 마음]이
”오히려 버림받은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찢고, [십자가]를 부순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괴로웠다면,
자기 아들의 몸을 찢고, 외면하던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괴롭다.”고 하더라도,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 현지 리더십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성경을 찢고, 또 십자가를 부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정죄함과 모든 의심을 뛰어넘는 사랑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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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짐] 속에서, 이루신 구원 (마27:45-54) 말씀: 길혜영 목사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으시고, 우리를 선택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된 그 자리에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상한 일]은 ①온 땅에 어둠으로 가득하고, ②성소에 휘장이 찢어집니다.
③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④무덤에 있던 성도들이 살아나서 일어납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마치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이런 현상은 “세상의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왜, [은혜의 시작]이라고 하나요?
①첫째로, [예수님의 몸]이 찢겨져, ”하나님께 가는 은혜”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에, “바로 그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쪽으로 찢어졌습니다.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졌습니다.”라는 기록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찢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렸다.“ 것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찢어진 휘장 사이”로, 거룩한 장소, [지성소]가 훤히 들어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절대로 들여다볼 수 없었던 거룩한 장소, [지성소]가 완전히 열린 것입니다.
여기서 [찢어진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찢게 하셨어요.
이제는 모든 거짓의 휘장, 율법의 휘장은 걷어 버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이제는 [거룩한 장소]는 없어지고, “모든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습니까?
①[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②[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열심히 드리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내가 그만큼 죄를 지었구나.”라고 기억나게 할 뿐,
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린 양 되신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어서, 그 피를 십자가에서 흘리셨습니다.
저는 “차세대의 교역자”입니다. [차세대 사역]을 하다 보면,
①구원의 확신이 없던 친구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하거나,
②우울증으로 집 밖에 나가지 못했던 친구들이 학교를 다시 나가게 되었다거나,
③마냥 어린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중보기도 모임을 만드는 등,
너무나 좋은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은혜의 휘장]이 활짝 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과 청년들의 예배가, “우리의 꽉 막힌 관계”가 달라질 것입니다.
자녀들이 예수님과 함께 아름답게 지어져 가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2)두 번째는 “우리 몸에 부활이라는 은혜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2- 53절의 말씀에, “무덤들이 열렸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습니다.”(마27:52-53)
[무덤]은 “죽음이 있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무덤이 열렸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마른 뼈에 살이 붙어서 일어나듯이, 죽음의 권세는 꺾이고, 자던 성도들이 부활함으로,
[몸]이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것”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얻는 은혜가 시작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씀하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가진 소망이 오직 이 생명뿐이면,
우리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의 썩을 몸도 부활하실 영광의 몸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①무덤이 터지고, ②신앙의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③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끝 날에, 부활을 예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셨고,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이 마태복음 27장 54절의 말씀에,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 지진과 그 모든 사건을 몹시 두려워하며 외쳤습니다.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방인도 하나님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새로운 은혜의 신호였습니다.
[이방인]인이, 백부장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여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고, 가장 가난하고, 가난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 있었을 때,
”그 죽음이 결코 종말이 아니고, 새로운 은혜가 열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지성”이라고 하면, 저는 [이어령]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그가 그녀의 딸이 [암]에 걸려서 세상을 떠날 때, 그 얼굴이 너무나도 평안하고, 기쁨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딸이 남긴 책과 성경책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드디어 나에게 찾아왔구나.”를 느끼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글을 쓰며 살았지만,
”인생의 마지막에는 한 글자만 남기고 싶다.“면, 그 글자는 바로 [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도저히 복음이 닿을 수 없었던 ①백부장과 같은 이방인에게도,
②가장 천대받던 여인에게도, ③지성과 논리가 대단한 똑똑한 사람에게도,
지역과 성별과 모든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어서,
누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 은혜를 얻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음 세대에 부흥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 짓습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 이유로 ①학교에서는 반기독교적인 교육들을 받고 있고,
②[세속주의]에 ”물질 만능주의“가 우리의 청년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몸을 찢으시고, 자던 자들을 일으키셔서, 새롭게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잘 나서 은혜가 필요 없는 사람도 없고, 너무 못나서 은혜가 닿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 가정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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