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눅24:13-35) 2025.04.08

다이나마이트2 2025. 4. 8. 11:04

2025 40일 특새[30] 다시 뜨겁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24:13-35)  말씀: 도육환, 이승민 목사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의 예배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왜, 살아갈까요? 순서를 보면,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었고,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처음부터 [부활의 주님]을 믿은 건 아니지요.

우리에게도 [믿음의 단계]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믿지 않았는데,

[불신]에서 [신뢰]로 바뀌게 되고,

[믿음]에서 더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단계들을 밟으면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불신]에서 [믿음]으로 옮겨진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두 제자의 고향이라고 추정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약 11km 정도 떨어져 있으니,

성인 걸음으로 서너 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두 제자]인데,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큰 슬픔과 실망에 사로잡히게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서, 고향으로 낙향하는 길에 나눈 대화입니다.

 

그들이 실망하여 걷는 길에, 자기들 옆에서 걷고 있는 한 낯선 나그네가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를 못했어요.

, 그렇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걷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한 낯선 나그네[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나사렛 예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최근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일]을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도,

정작 그 이야기를 듣고, 같이 가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좀 의아합니다.

어제 우리가 묵상했던, [마리아]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무지]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3가지 이유]를 알아야, [부활 신앙]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첫 번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전과 다른 []을 가지게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데, []을 걸어 잠그는 다락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제자들과 함께 빵을 떼다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시니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을 가지셨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에는 못 박힌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빵도 떼시고, 그리고 포도즙도 함께 드셨으니,

예수님은 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계셨고, [영의 몸][육체의 몸]이 하나로 묶인 모습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편의상 [부활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0절에, ”또 하늘에 속한 몸들이 있고, 땅에 속한 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몸들의 영광이 다릅니다.“(고전 16:40)

 

[주님]은 부활하시면서, ”땅에 속한 몸하늘에 속한 몸을 함께 가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몸과, [부활하신 이후]의 몸은 신비한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겁니다.

 

(2)두 번째 이유는/ ”두 제자의 [영적인 눈]이 가려져 있어서,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에,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그들의 []이 무엇으로 가려져 있었을까요?

그들은 깊은 슬픔과 좌절로 인해, []이 가려져 있거나,

낙심 때문에, 다른 일들에 대해서 [무관심]하기에, 가려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도 간혹 큰 슬픔에 잠기거나, 충격에 빠졌을 때,

가까이에서 일어난 일들조차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죠.

 

아니면, 그들은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염두에 두지를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는 믿음]이 없으니까, 어찌 그것을 기대했겠습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두 제자]도 그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별히 [그들의 눈]이 가려진 것은 [메시아]에 대한 오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었는데,

[두 제자]도 그렇게 기대하는데, [예수님]이 죽었으니, 아예 눈을 감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바로 알아야, [부활 신앙]이 가능한 것입니다.

 

(3)세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은 말씀에 무지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부활]은 구약에 300여 차례 예언되었으나,

그들은 [약속의 말씀]에 무지했고, 믿으려는 의지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 그들은 더디게 믿었을까요? 고집이 세서 그럴까요?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생각이 많아서그럴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도 [전제]가 있는 겁니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앙의 박스] 안에서 나오지 않았기때문입니다.

그들은 []을 깨고, 인식을 버려야, [새로운 사실]이 믿어지는데,

그들은 [부활]이라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 차례 이상 부활하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귀담아듣지도 않았고, 믿음으로 승화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바로 알아야, [부활]이 믿어집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오시고, 우리를 구속하신 [십자가의 사건],

[말씀]을 바로 알아야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안에 “[말씀]에 대한 이해,

“[부활의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고,

그런 [주님]이 낙심한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고, 그들의 어리석음도 깨우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올바로 서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이해하면, 삶의 방향도, 믿음의 방황도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이제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돌아서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다시 [복음]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부활의 현장]에는 무덤 []이 열리고,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예배 자리]로 돌아오고, [사명]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사순절]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이 열리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변화]가 나타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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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뜨겁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24:13-35)  말씀: 이승민 목사

 

저는 이 시간에, [회복의 3단계]라는 주제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8-29절의 말씀에, “두 제자가 엠마오 마을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런데 이제 다 왔다 싶은 그때, 예수님이 그냥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우리와 함께 유숙하시자고 예수님을 간절하게 붙듭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우리가 붙들지 않으면, 예수님은 그냥 지나가십니다.

누구나 [붙드시는 자]가 있으면, 거기에 머물러 유숙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을 간절히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회복]은 예수님을 간절하게 붙들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회복될까요?

(1)회복의 첫 단계는/ 예수님에게 유숙하시기를 청하는 단계입니다.

 

30절에, “예수님이 빵을 드시곤, 잠시 감사 기도를 하시죠.

그리고 조용히 빵을 떼셔서, 두 제자에게 한 조각, 또 한 조각 나눠주십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사건]은 불과 3일 전이었는데, 제자들이 몰랐을까요?

[제자들]은 빈 무덤 얘기도 들었고,

심지어 길에서 [십자가 부활]을 풀어주셨음에도 여전히 제자들은 []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몰라볼 수 있을까요? 그런데 두 제자가 31절에,

주님이 떡을 떼 주시는 [못자국난 손]을 보고서야, ‘그 때, 주님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회복의 2단계는/ [십자가][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그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영안]이 열리게 된 것이죠.

이것이 회복의 2단계이고, ”[십자가][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내 것]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것은 [예수님의 얘기]가 어느 순간에, [내 이야기]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동안 [머리]로 알고 있던 [복음],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어 박혀야 합니다.

그 때부터 내가 변화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못자국난 손]을 보는 순간에,

”[예수님의 고난][나 때문]이었구나.“를 알게 되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그게 바로, [십자가가 내 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24절 하반절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갑자기 예수님이 사라지신 겁니다.

 

, 주님이 사라지신 걸까요? 너무 하신 거 아닌가요?

좀 곁에 계셔주시면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이것은 [믿음의 훈련]인 것입니다.

 

32절에서, [두 제자]들은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24: 32)라고 말합니다.

 

바로 직전까지/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고 낙심하던 두 제자인데,

이제는/ 예수님이 안 보여도, 말씀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 마음이 뜨거워졌을까요?

그것은 나를 살려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신 이유를 깨달았기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으로, “나의 현재의 이유를 아는 사람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이 사라지셔도, 낙심하지 않고, 말씀만으로도 사라지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리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들어야 할 말씀을 들으며,

[말씀]만으로도 뜨거워지는 믿음이 생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세 번째로/ 회복의 마지막 3단계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단계입니다.

[영의 눈]이 열린 제자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하는단계입니다.

 

33절에, ”그들이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제자]는 깨닫는 순간에, 주님을 알아보는 영안이 열렸을 때,

두 제자는 망설임 없이 즉시 일어나,

[십자가][내 것]이 되었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두 제자에겐 실패한 자리, 도망친 자리, 무서워서 피했던 자리 아닙니까?

그런데 환경은 안 바뀌었어도, 지금은 제자들이 [영난의 눈]이 열려서, 바뀐 것입니다.

 

결국에, ”[내가] 바뀌니까, 예루살렘이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곳이 내가 있어야 될 자리라는 [사명]을 깨달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은 어디입니까? 상처만 남은 가족, 숨 막히는 직장,

또 반복해서 실수한 그 곳, 관계가 끊어지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그곳은 어디이십니까?

 

그렇다고 여러분이 그 예루살렘으로 도망친다.“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던가요?

직장 옮겨도, 사람 바꿔도, 공동체를 떠나도, ”내가 안 바뀌면, 문제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내 것]이 되지 않고, 바뀌지 않는 [내가] 문제인 것이죠.

 

이제/ [변화된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34-35절에,

그곳에 모여 있던 나머지 11 제자가 외칩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열한 제자 앞에서 길에서 있었던 일과 빵을 떼실 때, 주님을 알아본 이야기를 선포합니다.”(24:34-35)

 

그들은 나도 예수님을 만났다. 나도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분이 주님이시다.”고 선포합니다.

 

저는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과연 [목사]를 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는데, 그런 순간에, [주님]이 먼저 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승민아, 이런 고난은 있어야 될 일이야. 그래야 영광이 찾아오는 거야.“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 때까지 제 []은 여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전하는 목사였지만, 부끄럽게도 예수님 이야기가 전혀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던 죄인입니다.

그래서 불안과 무력감 속에서 환경 탓만 하던 어느 날,

제 마음 깊은 곳에서 성령님께서 탄식하는 기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살고 싶습니다. 주님, 저 부족하지만,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요.“라고 기도하는 그 순간에,

[주님]이 제 마음에 유숙해주셨고, 떡을 떼어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에, []이 열리게 되고, 주님이 다시 보이게 됐습니다.

 

그 때부터, [십자가 부활]이 진정으로 [내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부족한 저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절망하는 사람에게 주님, 주님이 제게 나타나셨고, 주님이 저를 살려주셨고,

부족한 죄인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바로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말씀], 저에게 정말 많은 큰 위로와 회복을 주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실패와 절망하고 계십니까?

내 곁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끼고, 외로움과 절망에 잠겨 계십니까?

 

그런 사람은 기억하십시오.

이 시간 예수님에게 내 마음에 유숙해 달라.“고 간절히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내 것]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닫혔던 문이 열리게 되고, 그동안 피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시게 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여러분 삶에 놀라운 변화와 회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