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 40일 툭새[19] 좋은 밭의 이유 (마13:18-23) 말씀: 김신재, 최대흥 목사
오늘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한 농부가 있었는데, 이 농부는 밭을 갈고, 좋은 씨앗을 좋은 밭에 뿌렸습니다.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고, 밭에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씨앗들은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며 씨를 뿌렸습니다. 하지만 이 농부의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좋은 밭]에만 씨를 뿌리지 않고,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던 불]이 가득한 곳에서도, 씨를 뿌렸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왜, 그런 곳에 씨를 뿌리냐고요. 하지만/ 이 농부는 포기하지 않고,끝 까지 씨를 뿌립니다.
그것은 당시의 농사법에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바위가 많은 산지를 [계단식]으로 만든 땅이라, 계단 끝부분에는 비옥한 흙이 쌓여 [좋은 밭]이 되지만,
계단 중간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 있고, 위쪽으로 갈수록 [돌]이 많아 척박한 땅이 됩니다.
그래서 쟁기질은 하지만, 질서정연하게 홈을 만들지 못하고, 널리 흩어 뿌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똑똑한 농부라면 좋은 밭에 씨앗을 뿌리겠지만, 오늘 비유의 농부는 모든 땅에 씨를 골고루 뿌렸으니, [사람의 눈]으로 보면 씨앗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23절의 말씀에,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열매를 맺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낸다.”(마13:23)
이 농부는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었습니다.
비록 많은 씨가 버려지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는 풍성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어리석은 행동 같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그 씨앗은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와 노인, 남자와 여자, 또 부자와 가난한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지위가 높은 자와 낮은 자,
죄인과 바리새인, 심지어 자기를 배반할 자에게까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누구든지 들을 수 있도록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하는 경험을 하셨고, 때로는 조롱과 수치를 당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조차 등을 돌리고, 떠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듣지만, 깨닫지 못했던 ①“[길가]와 같은 사람“에게도 씨를 뿌렸고,
예수님은 고난이 찾아올 때 넘어지는 ②”[돌밭] 같은 사람“에게도 씨를 뿌리셨고,
예수님은 세상 유혹에 흔들리는 ”[가시덤불] 같은 사람“에게도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앗이 뿌려졌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치 [그 씨앗들]이 낭비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복음의 씨앗]들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시앗]은 온 세상에 전파되고,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지금 저와 여러분과 같이 열매를 맺어, ”복음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농부]를 [아버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떤 자녀는 ①”돌 같은 굳은 마음“을 가져서 마음을 꾹 닫습니다.
어떤 자녀는 ②가시던 불이 가득하여, 합니다.
어떤 자녀는 ③매사에 관심이 없고, 매일매일 마음이 흔들립니다.
어쩌면 한 자녀인데, 모습들을 보면, 제 각각 다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이 자녀를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인데, 이런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포기]가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녀들입니다.
때로는 [자녀의 마음]이 ①길가와 같고, ②돌밭과 같고, ③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좋은 밭]이 되어, 열매를 맺고 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의 마음이 좋은 밭과 같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①한때는 [길가]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흘려보내기도 했고,
②[돌밭]처럼 쉽게 무너지고,
③[가시덤불]처럼 세상 욕심에 붙잡혀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복음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①그런 [은혜]가 있었기에 마음에 [돌]을 치우셨고,
②그런 [은혜]가 있었기에, [가시던 불]을 걷어내셨고,
③그런 [은혜]가 있었기에, [길가]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④마침내 우리 안에 [복음]이 뿌리내리고, [열매] 맺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어린 양 되신 예수“를 바라보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이제 [다른 밭]을 향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합니까?
①우선 [믿음이 연약한 가족]을 향해서,
②가까운 [이웃]이나, [동료]를 향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도 누군가의 [마음 밭]을 바라보면서, ”복음을 뿌리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뿌리는 자]의 수고“는 헛되지 않고, 복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안에 복음의 열매“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의 기쁨]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두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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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밭의 이유 (마13:18-23) 말씀 : 최대흥 목사
앞서 김선재 목사님께서 ①씨를 뿌리시는 농부의 관점에서,
또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는 이 예수님의 관점에서 말씀을 나눠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23절에 나오는 한 절을 통해서
①[밭]의 입장에서, ②[씨 뿌림을 받은 성도]의 입장에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옥토]가 되어,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요?
(1)첫 번째로/ ”말씀을 듣고,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감동하고 은혜를 받는 것을 넘어서서,
”그 말씀을 [기억]하고, ‘현실에 적용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6장에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들을 향해서 선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유일하신 여호와의 신인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을 선포합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했으니,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손목과 이마에 그것을 기호로 삼고, 너희 집의 대문과 문설주에 기록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이후에, 혹여나 가나안에서의 풍족한 삶으로 인해서,
너희를 애굽에서 구해내신 여호와가 누군지 잊을까 하노라.
기억하기 위해서 너희가 이것을 기록하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일종의 [기억의 투쟁]과도 같은 것이죠.
그래서 헬라어 원어에서 [진리]라는 것은 ”[망각]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이 되어서 사용되는 말이므로,
결국에는 [진리]와 [망각]은 ”한 끝 차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서, “삶에서 기억한다면, 생명력 있는 말씀으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망각을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 말씀을 [기억함]으로, ”열매 맺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23절의 본문에,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억]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분별할 수 없다.“면,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양식]을 구하려고, 주님을 홀로 두고 떠납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되고,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자신을 소개해 주고,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자신“을 소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양식]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먹는 음식”을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고,
”그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더욱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우리 가운데 주시는 말씀 앞에, 반드시 [기억]되고,
그리고 [깨닫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셋째로/ 마지막으로, ”말씀을 듣고,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8장 15절에,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뒤,
그 말씀을 굳게 간직하고, 인내해,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깨닫는 자리]로까지 나아갔다면,
”이 말씀을 간직하고, 인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인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 [민수기] 12장 3절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도전하는 장면인데,
그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뭐라고 변호를 하시냐?”하면,
민수기 12장 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변호합니다.
우리가 흔히 [온유함]을 생각을 할 때, 인간적인 성품이 유순한 마음을 생각할 때 사용하지만,
[히브리어]로 ”온유하다.“는 것은 [야생마]를 길들일 때 사용되는 표현으로, ”통제되어지지 않는 말“이라는 의미입니다.
[야생말]은 [조련사]에게 인계하여 통제되는 말로 훈련시킵니다.
조련이 끝이 날 무렵쯤에, 마지막 테스트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게 하고, 고강도의 훈련을 반복합니다.
[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마시지 않았으니, 무척이나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마쳐질 무렵에, 우물가 근처로 데리고 가서, 하루 종일 통제하던 말의 고삐를 놓아주는 거죠.
▶거기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당연히 하루 종일 굶주리던 말은 물을 향해서 달려가서 물을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 [조련사]가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것은 “아직 인내해야 할 시간이 더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훈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말머리를 돌려서 돌아오는 말“이 [명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네가 온유해졌구나, 드디어 니가 인내를 배웠구나,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본성대로, 세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언제나 신실하고, 참됨으로 받아 드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고백하고, ”주님께로 말머리를 돌려서 돌아오는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온유]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인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①말씀을 기억하는 것, ②그리고 말씀을 깨닫는 것,
③그리고 인내하는 삶으로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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