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치며 솟구치는 독수리처럼 (사40:26~31) 말씀: 이재훈 목사님
2025년 신년 새벽기도는 "오직 예수"를 표어로, "새 힘을 얻으리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날마다 “새로운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적절한 수면으로 영양 보충하고, 운동을 통해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런 방법으로는 결코 힘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건강하게 단련시키면 [힘]이 생기지만,
우리의 [영혼]은 그런 방법으로는 [힘]이 생기지 않고, 두려움과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힘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새 힘]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첫째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②둘째는/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새 힘]은 어떤 때, 나오나요?
①첫째는/ 우리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것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은 있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어요.
유명한 [제이비 필립스]라는 분이 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습니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가진 개념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들을 나열한 책인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있는 경찰과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경찰]은 ”부정적인 의미“로, [양심]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나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는, 나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인간 자신의 안에 있는 양심을 하나님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찰]은 “나의 자유를 앗아가는 폭군”으로,
내가 사소해 보이는 실수만 해도 “나를 벌을 주려고 쫓아다니는 폭군처럼” 생각합니다.
[기준]은 “자신의 양심”이 기준이 되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지 못한다.“는 겁니다.
②둘째로/ 사람들이 많이 가진 것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의 이미지“인데, 그 이미지를 버려야 합니다.
많은 [무신론자]들의 공통점이, ”하나님 아버지와 육신의 아버지가 서로 연결되어,
불편한 관계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어린 시절에 상처받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무섭고, 어려운 존재로 생각하니까, 우리가 이런 이미지를 버려야, 온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③세 번째로/ 하나님을 ”불평의 대상으로“만, 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를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생각하지 않고, 무슨 일만 잘못되면,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들“이 하나님께로 부터 얻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 27절에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나옵니다.
27절에, ”야곱아, 네가 왜, 이렇게 말하느냐? 이스라엘아, 네가 왜,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왜,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져 있고, 내 공의는 하나님이 무시한다 하느냐?“(사40:27)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인도해 주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는 상황이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혼의 힘]을 잃어버린 모습으로, 불평을 합니다.
더구나 불경건하고, 불의한 이들이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더 힘을 잃어버리죠.
이런 모습에서, [내 사정]은 하나님께 숨겨져 있고, [내 공의]는 하나님께서 무시한다는 생각은 의심이 아니라,
그냥 확신이 되어서, [영혼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눈을 높이 들어 위를 쳐다보라.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했느냐?
그분은 별자리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그것들을 각각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의 능력은 크시고 힘은 강하시니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부르신다.
시편 40편 28절에, ”너희는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듣지 못했느냐.
여호와는 영원한 하나님이고, 땅이고 땅 끝을 창조한 분이시다.
그분은 지치거나 피곤해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찰력은 아무도 탐구할 수 없다.“(사 40:28)
이 말씀은 ”눈을 높이 들어, 위를 쳐다보라.“는 말씀이고,
이 말씀은 ”[예배의 자리]로 나오라.“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로 서라.”는 말씀입니다.
[이사야] 말씀에서, 별자리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묵상합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 그 놀랍고 섬세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시는 하나님,
그렇게 전능하시고 능력이신 분을 “우리가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73편에서 악한 자들이 형통한 것을 보고, 힘을 잃어버린 [아삽]도 언제 힘을 얻기 시작했냐면,
”바로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예배의 자리]로 나갔을 때입니다.
시편 73편 16- 17절에, ”내가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하나님의 성소로 들어가, 그때서야 결론을 얻었습니다.
26절에, “내 몸과 내 마음은 다 쇠약해졌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힘이시어,
영원히 지속되는 내 몫이십니다.”라고 거룩한 하나님, 임재 앞에 나아가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했던 부정적 생각과 불평들이 바뀌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의 힘이 되심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뀝니다.
▶그 때는 언제입니까? 그 때는 ”낙심과 의심이 사라지고, 눈을 들어 위를 쳐다볼 때,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의 영혼”에 [힘]이 생깁니다.
내 길과 내 정의를 주장했던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정의의 시각을 가지는 길은
오직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만물을 창조하시며 세밀히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을 얻는 길입니다. 나의 길과 내 정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1)첫째로/ 하나님께서 나를 공정하게 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보다 큰 것을 생각하는 분이므로,
믿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2)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28절의 말씀에,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여호와는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땅 끝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치거나 피곤해 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통찰력은 아무도 탐구할 수 없다.“(사40:28)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영원하시기에, 지치지 않으시고, 피곤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어떤 복잡한 일도 하나님께는 피곤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셋째로/ [자신의 힘]은 쉽게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힘]은 날마다 새롭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29- 31절의 말씀에, “그분은 지친 사람들에게 힘을 주시고, 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라도 지쳐 피곤하고, 장정이라도 걸려 비틀거리겠지만,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 솟구치듯 올라갈 것이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40-29-31)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면, 피곤하고 지쳐 비틀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쳐 있는 영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내 영혼은 피곤하고, 나는 힘이 필요하고, 나는 연약합니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영혼들은 “하나님께 주신 새로운 힘으로 독수리같이 솟구치며 올라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역사]에, 하나님은 연약한 이들을 통해, “얼마나 놀라운 일을 이루셨는지?”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우리 하용조 목사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건강이 연약하셨습니까?
그렇지만 그 연약함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통로가 됐지 않습니까?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될 때는, [자신의 힘]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함을 깨달을 때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합니다.
▶여기서 왜, 독수리처럼 올라간다고 말씀했을까요?
[독수리]는 폭풍이 닥쳐오면, 폭풍의 힘을 타고, 더 높이 비상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독수리]는 “위기가 기회”가 되는 거예요.
다른 모든 새들은 바람에 휩쓸려가고, 피하고 숨고 있지만,
[독수리]는 강한 바람이 불수록 더 높이 비상하는 비결을 체득한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히브리어 성경에 “새 힘을 얻을 것이다.”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나의 힘]에 [하나님의 힘]을 보충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힘을 교체한다.는 뜻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나의 힘]을 완전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힘‘으로 교환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 독수리처럼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길과 내 정의를 주장하지 말고, 내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법을 체득할 때),
우리는 독수리와 같이, 새로운 힘을 얻고 솟구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불평]이 솟아오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감사]가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과 폭풍이 몰려와도, 새로운 힘을 얻는 독수리 같은 영혼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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