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높은 곳에서 뛰어다니는 사슴처럼 (합3:17~19) 말씀: 이재훈 목사님
[믿음]은 폭풍이 몰아칠 때, 더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음의 사람]도 위기의 때에 나타나는 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위기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백성들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폭력과 우상 숭배가 만연함으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때, 그 한복판에 서 있던 선지자입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의 뜻은 “끌어안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그 시대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끌어안고, 백성들을 끌어안았습니다.
[하박국서]의 마지막 구절에, 나타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박국이 1장 초반부에서 던졌던 하나님께 대한 그의 기도들을 우리가 대조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①하박국 1장 2절에서 “오 여호와여, 제가 언제가지 부르짖어야 합니까?”라고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시작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3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끝납니다.
1장에서는 [항의]로 시작했지만, 이제 3장에서 [찬양]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1장에서 하박국의 질문들이 거칠게 보이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가 격동기”였기 때문입니다.
②1장에서 그는 [두려움]으로 시작 하지만,
마지막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끝납니다.
③1장에서 그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 버려서, 정의가 왜곡되고 있습니다.”라고 [염려]하며 시작을 하지만,
마지막 3장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님께 대한 항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로 시작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 그리고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 시대도, [하박국]이 경험한 모습이 아닐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런 사람은 “믿음의 비밀을 체험한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들은
당시 ”백성들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자원“이고, 양과 소도 유목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계 자원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에 싹이 트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서 수확할 것이 없다.”고 했을 때,
또 우리 안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17절에, 한마디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된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3장 18- 19절의 [하박국의 고백]은 억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어떤 사람에게는 현실 감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믿음의 고백]에서 발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가 어떻게 [영혼의 힘]을 얻었는지?”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1)첫째로/ [하박국]은 하나님 그분만을 기뻐하였기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것을 기뻐하는 것과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것을 우리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기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고,
”도리어 고난과 절망을 주셔도, 기뻐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러한 시험이 [욥]이 받았던 시험이죠.
[욥]에게 이런 질문이 던져진 것이 ”바로 그가 당한 시험“입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은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사단이 주장하지만,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경배했는가?
아니면, 그 시험을 통과하여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 것입니다.
그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죠.
우리 모두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압니다.
[욥기]의 메시지는 아주 단순한 이것인데, [욥기]가 그렇게 긴 것은 ”그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그만큼 힘들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기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가?”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영화롭게 하는 [믿음의 순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기뻐하는 [믿음의 단계]로 올라갈 때,
그 사람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영혼의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타락한 [옛 자아]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기쁨이죠.
“무화과나무에 싹이 트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해도, 올리브나무에서 수확할 것이 없고,
밭은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해도, 우리 안에 양떼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고 해도,
내가 기뻐할 것이고, 내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이다.“(합3:17~18)라는 고백을 마음에 새기기 바랍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에서 반드시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욥]에게만 이런 시험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욥의 시험]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
”반드시 이런 시험을 겪게 하신다.“는 거죠.
그리고 그런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인 [욥]이기에, 그런 시험을 허락하시는 거예요.
역설적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자이기에, ”그런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박국이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심판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박국]이 직면한 이 상황은 분명 심판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런데 [하박국]은 심판 너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기에“ 그렇습니다.
심판의 목적 또한 ”구원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심판하실 때, 하박국은 3장 2절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진노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죠.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십자가]가 그토록 끔찍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심판이 임한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에게 자신의 심판을 쏟아부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의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십자가라는 어떤 구체적인 방법까지 그가 믿지는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심판을 넘어 구원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심판 넘어 구원의 목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죠.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나라의 혼란한 상황은 ”나라와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의 심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바라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하시는 그런 과정이기에,
”이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께서 선한 역사로 붙잡아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에, 반드시 이 나라 민족을 붙잡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상이 만연한 이 세상에 경종을 울리고, 또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싸인을 주신 거죠.
깨어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하박국 선지자가 바라보았던
이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믿음의 눈“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둘째로/ [하박국] 선지자는 ”힘의 원천이 되신 하나님을 기뻐하였기“에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영혼“에는 하나님, 그분이 [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신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19절을 함께 읽어볼까요?
”주 여호와께서는 내 힘이십니다. 그분은 내 발을 사슴의 발처럼 만드시고,
그분은 높은 곳에서 나로 하여금 뛰어다니게 하십니다. 이것은 지휘자에 의해 현악기에 맞춰 노래한 것입니다.“(합3:19)
주 여호와께서는 내 힘이십니다. 느헤미야서에서도 말씀하고 있죠.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과 그분이 나의 힘 되시는 것을 함께 언제나 연결되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를 통해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신 것을 반드시 경험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의 힘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백성들은 또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회개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슬픔 가운데 머물러 있지 마라.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것이 너희의 힘이라.“말씀했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의 힘 되심을 경험하는 거죠.
십자가를 통과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떤 분은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고통이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그 죽음도 고통 없이 그렇게 쇼를 하듯 그렇게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성육신 하실 때,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다 내려놓으시는 거예요.
그 분이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다 내려놓으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셨는가? 어떻게 신성이 나타나셨는가?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신 거예요.
그랬기에 그분이 당한 고난과 고통은 우리가 당하는 일상에서 당하는 작은 아픔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동일한 고통이에요.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심으로, 내 발이 사슴의 발과 같이 되었다.“고 고백했어요.
여기서 사슴이 뛰어오르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경쾌하고 힘이 있고, 가벼운지 모릅니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이 되게 하신다.”는 표현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겁지만, 기쁨을 지닌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우리 성도들의 발걸음을 보면,
사슴의 발과 같이, 기쁨과 감사로 가뿐하게 걸어옵니다.
[다윗]도 이런 [하박국]과 동일한 고백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22장 34절에, “주께서 내 발을 암사슴의 발과 같이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세우십니다.”라고 노래했어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하나님은 이 나라를 절대로 무너지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상황 속에서, 사슴처럼 뛰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번 한 주간의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의 발걸음]이 사슴의 발과 같이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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