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어린아이의 하나님 (마18:1~6) 2024.05.05

다이나마이트2 2024. 5. 5. 18:54
어린아이의 하나님 (마18: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가르치실 때,
어린아이를 [비유]해서,  “어린 아이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연약하다.“는 의미와, ”경험이 부족하여 시야가 좁다”는 의미가 아니고, 
”어린아이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아주 긍정적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어떤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는지?“에 대해 말슴드리려고 합니다.
 
(1)첫째로/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의심 없는 믿음]을 닮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변화돼, 어린아이들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의 어떤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어린아이처럼,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어린아이들의 마음“은 [백지]와 같이 순수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어린 자녀의 인생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든 어릴 때부터,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북한에서는 어린아이에게 [사상교육]을 시켜서, “의심이 없이 김일성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성인들에게는 [믿음과 확신]이 확실하게 분리되지만,
그러나 어린아이에게는 “믿음이 곧 확신이라.“고, 믿고 행동을 합니다.
 
[의심]은 “영적인 질병”이고, 그런 [의심]은 “나누어진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의심을 한다.“는 것은 ”두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니까, 
오직 [의심이 없는 믿음]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의심 없는 믿음“을 가졌지만, 점차 자라면서 [비판적인 이성]으로 변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2)둘째로/ 예수님은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절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18:4)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을 낮춘다.“고 말씀했을까요?
이 말씀은 제자들 끼리 ”누가 더 큰 사람인가?“에 대해 다투는 모습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권력, 지배욕이고, 인간관계에서 ”누구의 말이 더 권위 있는가?“에 대해 서로 우기고,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끊임없는 지배욕“이 갈등을 이뤄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어린 아이에게서 배워야 될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낮춘다.”는 게,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유아 시절에 “학령기 이전의 단계”를 말하고,
그 정도의 아이들은 “아직 비교를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차별해서”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권력을 모르니까, 지배욕심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는 모든 영역에서 무지한 상태이므로,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저 사람을 이용하면, 내가 어떤 이익이 오는지도 알지를 못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지요.
그것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의 모습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3)셋째로/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을 닮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절에,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18:5)
 
또 마가복음 9장 37절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는 똑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과 아이를 동일시”하였고, 
더 나아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과 아이”를 동일시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리고 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 이름으로 아이를 영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이 단지 [돌봄의 대상]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차원의 맥락으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성품, 그 성품을 우리가 영접이라고 할 때는 
“내 안에 없는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마음속에, “구세주로,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단순한 믿음, 의심 없는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또 “지배하려는 욕심”이 아니고, “섬김으로 헌신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모습은 타락한 인간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 안에 있는 [어린아이 다움]은 단순하고 겸손한 헌신입니다.
 
이런 모습은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헌신하신 것은 언제나 먼저 허리를 숙이는 모습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세상에 있는 종교들은 “[피조물]이 [신]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린아이의 하나님”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아이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왜, 즐거워할까요? 
그것은 손주들의 노는 모습에서 “자신의 어릴 적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손주의 재롱을 보면서, “잃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손주의 모습]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어린아이다운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어린아이다움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되찾는 여러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