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핍박자를 증인으로 부르시다. (행9:1~19) 2024.05.12

다이나마이트2 2024. 5. 12. 22:18
핍박자를 증인으로 부르시다. (행9:1~19)  말씀: 이재훈 목사님
 
[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이 세상에 전해지는 일에 있어서, 쓰임 받은 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에 대한 “회심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발음으로, [유대인]들을 만날 때, [사울]이라 불렀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제거하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일에 주동적 역할을 했고, “그 일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 이후에, 예수를 믿던 [사도들]이 모두 흩어져서, 도망간 [다메섹]으로, 그들을 잡으러 갔는데,
[다메섹]은 지금의 시리아에 지역에 있는 “다마스커스”인데, 그들을 잡으러 가던 길에 [회심의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는 열정적인 사람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자기주의]가 강한 사람으로,
26장 9절에, “저도 한때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던 그가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고, 
그가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서, [큰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 “살려 달라.”고 하거나, “잘못했다.”고 빌지 않았고, 
“천사의 얼굴로 죽는 모습 속에서” [사울], 자신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바울의 “회심의 사건”을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9장 3- 6절에, 
“[사울]이 길을 떠나 다메섹에 가까이 도착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춰, 그를 둘러쌌습니다.
[사울]이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지금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행9:3~6)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울]을 찾아와, 부르신 사건입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그를 비추었습니다.
 
그 때에 비춰진 [빛]은 “태양 빛”이 아닙니다. “태양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이지만,
그 태양보다 “더 강렬한 빛”이어서,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태양 빛]은 “빛을 반사하는 발광체“일 뿐,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사울]에게 비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엎어 졌고, ”그 강렬한 빛“은 눈을 멀게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비춘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라고 이름을 두 번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부른 것“은 친밀한 부르심입니다.
 
예기서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충격적인 질문을 합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그동안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질문은 ”예수님이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도 ”하나님이 몰라서 질문하신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질문은 인격적으로 스스로 생각함으로 돌이키도록 요청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예수님은 ”강렬한 빛“으로 그를 땅에 엎드러지게 하였지만, 
그에게 인격을 무너뜨리지는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를 부르셔서, [사울]에게 보내셨습니다.
9장 11절에 보면, [아나니아]에게 말씀하는데, ”너는 곧 ‘곧은 길’이라고 부르는 거리로 가라.
그곳에 있는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 
 
지금 [사울]이 앞을 보지 못해서,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아나니아]에게 ”그를 찾아가라.“는 겁니다.
 
[사울]은 이 사건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부르심을 체험하고,
그 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울]에겐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눈을 뜨게 하는 일“인데, 그 일을 [아나니아]를 통해 행하십니다.
 
[아나니아]에게 ”가라“고 했을 때, [아나니아]가 어떻게 대답했나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온갖 해를 끼쳤고, 이곳에 온 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려고 온 사람“이니까,
대답은 ”안 됩니다.“인데, 핍박을 받았던 모든 성도들의 마음을 대변한 자연스러운 감정이지요.
 
어쩌면 그들은 [다메섹]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심판해 주시기를 기도했을 것이고,
”강렬한 빛“으로 눈을 멀게 된 것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아나니아]에게 그에게 찾아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 주라.”고 했으니, 선뜻 갈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주님이 [아나니아]에게 책망하듯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15- 16절에, “가거라. 이 사람은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한 내 도구다.
내 이름을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 내가 그에게 보여줄 것이다.“라고
강한 주님의 강권적인 음성이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는 나의 택한 그릇이요, 도구“라고 말씀하시며,
”그는 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증인의 삶을 살 것이다.“고 예고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그에게 안수함으로, ”그가 다시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고,
그는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위대한 [사도 바울]로 변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목사 안수 받은 7분 중에, 이기풍 목사님이 계십니다.
사회 지도층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고, 당시에 서양 선교사들이 ”나라를 삼키려는 음흉한 사람들이라.”고 함께 미워했어요.
 
그러나 마테 선교사님은 그러한 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복음을 전해서
1894년에는 22명에게, 학습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평양에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것이 [장대연 교회]입니다. 
 
그 장대연 교회 터에, 지금은 김일성 우상화하는 탑이 세워져 있고, 그런 시설물들이 있는 거예요.
 
“장대현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기풍]은 깡패들을 동원해서 건축 현장을 부숴버리는데,
그러나 마테 선교사님이 교인들을 달래며, 그들에게 [스데반]처럼 천사처럼 대했습니다.
 
그래도 [이기풍]은 변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잠을 자는데 꿈에서 “예수님의 환상”을 보았고,
그 음성은 “이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는데, 바울이 들었던 그대로의 음성을 들은 거예요.
 
“너는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는 음성에,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어났지만, 그래도 그는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던 때에, 청일전쟁으로, 잠시 원산으로 피신을 가 있을 때,
그에게 원산에서 사역하던 수알렌 선교사님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이기풍]을 보자마자,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소리는 하늘에서 울려 나오는 ”[우레 소리]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그는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평양 시내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한국의 [사도바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난 해에,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교회 최초의 7인 목사 중 한 사람으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국교회 역사에도 [사울]처럼, 이렇게 예수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를 회개시키셔서 [복음 증거자]로 증인으로, 세우신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붙잡으려고 갔지만,
“그리스도께 붙잡힌 자”가 되어서 훌륭한 [사도 바울]로 변했습니다.
 
과거에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자”였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로 변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살아계신 [주님의 능력]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기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삼으려고 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부르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