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행8:26~40) 2024.04.28

다이나마이트2 2024. 4. 28. 20:26
단순한 순종, 섬세한 섭리 (행8:26~4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의 말씀은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과정에, “누군가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된다.“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잘 아는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지만, 뜻밖의 사람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는데,
거기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만남이 그러했습니다. 
[빌립]이 복음을 전했을 때, ”그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26절에, ”그때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하고 말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에디오피아의 [간다게]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디오피아의 재정을 맡은 [관리]인데,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고, ”한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이런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만남“입니다.
 
▶왜냐하면, [빌립]에게 ”사람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지역에서, 사람들이 없는 [사막]으로 가라”는 [지시]는
사람을 만나기 힘든 “광야의 길로 가라.”는 것이니까, 이해하기 어려운 지시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이 지시에 따지지 않고, 단순하게 순종했습니다.
이런 [단순한 순종]은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를 체험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단순하게 순종할 때, 그다음 스텝을 알려 주십니다.
▶왜, 하나님은 미리 모든 것을 다 알려주지 않고, 조금씩 알려 주실까요?
그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알려주면, 미리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한 걸음씩 나누어서 알려주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 길]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맡은 고위 관리입니다.
그러니까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그러니까 한 국가의 “재무부 장관”인 셈이죠.
 
“그런 책임을 맡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빌립]을 만났는데,
28-29절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 앉아 예언자 이사야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빌립에게 ’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8:28-29)
 
그 당시에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질서 속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
율법학자들이 읽던 두루마기를 구입하여서, “읽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죠.
 
성령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에게, [빌립]을 보내신 겁니다.
빌립이 광야 길로 갔을 때, “저 마차로 가까이 다가가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빌립]은 이 사람을 만나서, 30절에,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질문하니까,
그가 ’설명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소?’라고 대답하면서, ‘자기 마차에 타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가 언어적 능력이 부족해서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것은 어떤 학위 과정을 해야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을 공부해도,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복음을 깨닫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성경을 여러 번 읽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종교적인 열심으로, “[영]적인 눈”을 열게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종교적인 열심은 가졌지만, 자신이 읽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놀랍게도 그가 읽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절에서 38절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2- 33절의 말씀을 그가 읽고 있던 것입니다.
“그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갔고,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을 당하며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해, 이 땅에서 그의 생명을 빼앗겼으니,
누가 이 세대의 악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행8:32-33)
 
이 구절에서 시작하여, 
[빌립]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단순한 [순종의 명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관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한 말씀이지만, 
그것을 읽는 관리는 “그 말씀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구절을 시작하여 설명해 주고,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가 어린 양처럼 도살장에 끌려가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를 대속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여러 번 열심히 읽어도, 깨닫지 못했던 그 사람의 [눈]이 
”설명을 들음으로“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여는 열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것은 성경의 모든 구절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신학적으로 복잡하게 설명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 주면, 듣는 사람이 그 예수님을 점점 알게 되면서 믿게 되고,
성경을 읽을 때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을 전하는 게 아니라, 교회의 규칙을 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들은 [내시]는 스스로 세례받기를 원했습니다.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려, 물가로 내려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두 사람만의 [세례식]이었지만, 성령님의 감동과 역사가 나타나는 장면입니다.
[빌립]과 [에디오피아 인]을 비교해 보면, 세상적으로 차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빌립]은 평범한 유대인이지만, [에디오피아 인]은 한 나라의 장관이고,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이니까,
그런 것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전했을 때, “그가 세례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 증거]는 어떤 사회적 문화적 차이도 뛰어넘습니다.
세상의 지식이 부족해도, 세상의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빌립]과 같이 [복음]을 믿고, 단순히 순종하며 예수님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섬세한 섭리가 작동하여, “우리도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①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쓰임 받는 도구”가 되고, 
②둘째로,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