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행7:54~8:3) 2024.04.14

다이나마이트2 2024. 4. 15. 08:25
순교가 선교의 문을 열다 (행7:54~8: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저는 오늘, 하나의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과연 나의 생명과 바꿀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자신의 [생명]”입니다. 
오직 하나 뿐이 [자신의 생명]을 “예수를 위해, 버릴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려고, 우리 모두가 힘쓰고 있는데,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다 기쁘게, [믿음]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순교에 도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때로는 위선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우리의 신앙]을 신앙답게 만들어 준 것은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순교]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는 ”선교의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번째 순교자가 [스데반]이니, 오늘은 [스데반의 죽음]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스데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스데반]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동시에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문이 열렸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모습에서, ”단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스데반]은 순교한 [예수님의 모습]과 꼭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스데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1)첫째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모습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진실 앞에서 담대하게 행동합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 앞에 당당하게 행동합니다.
 
(2)둘째로, [스데반]은 살기 위해 진실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역사의 심판자“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진리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하게 진리를 증거했습니다.
[스데반]은 분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모습,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탄의 영“에 사로잡혔고,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7장 56절에,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스데반]은 자신의 용기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는데, [성경]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①하나는/ ”하나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라고 묘사할 때와
②다른 것은/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 표현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초대교회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①“오른편에 [서] 계신다.”는 것은 “변호하고, 중보하신다.”는 의미이고,
②“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할 때는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이고, 
우리를 향하여 변호하고, 중보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3)셋째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며, 죽이려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59- 60절에서,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행7:59-60)는 기록이 보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기도를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①[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기도와,
②[스데반]은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기도했고,
이런 [스데반의 기도]는 “복수하는 기도”가 아니라,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왜, [스데반]이 [예수님의 기도]와 동일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살아계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했기에, 그런 기도가 터져 나온 것입니다.
 
58절에,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울]은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사울]은 히브리식 발음의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제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사울]이 [바울]이 됐다.“고 하는데,
①사도행전의 전반부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나오는 것은 
---> ”그가 부르심을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②후반부로 갈수록, 부르심 받은 이후에, [바울]을 더 많이 쓴 것은, 
--->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기에, [바울]이라는 이름을 더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스데반의 순교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그냥 ”구경꾼“이 아니라, 스데반의 죽음에 ”협력자“이고, 
더 나아가 ”책임자“가 될 수도 있는 위치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에 의해서 전도 받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기록할 때, 틀림없이 [바울]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스데반의 죽음“을 잊을 수 없어서,
돌에 맞는 순간에,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히 여기고, 기쁘게 생각하기에,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 받게 된 것은 
“스데반의 용서에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참여하는 이들을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셔서, 그 무리 중에 책임자로 있었던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울]이 기억하고, 
[누가]를 통해, 이 장면을 기억하며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 충만한 이들의 중보기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중보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지금도 이 땅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는 이제 초대교회에 주어지는 ”핍박의 신호탄“이 되었고,
그때부터 성도들은 흩어지기 시작했고, 흩어진 성도들은 핍박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 생각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로,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대로, 그들은 초대교회에 머물면서, 자발적으로 예수를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역사]는 멈출 수 없고, 가둘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핍박을 통해서 흩어지게 하셨고, [흩어짐]은 ”곧 복음의 확산“으로 이어졌으니,
이런 역사적인 흐름을 알았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