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행4:32~37) 2024.03.03

다이나마이트2 2024. 3. 3. 21:20
나눔으로 채우고, 위로로 세워가다 (행4:32~3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령 사건”은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왔는데, 
①첫째는,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②둘째로, 그들은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공동체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생활이 어려워서 궁핍하게 살았는데,
그들에게 ”기쁨으로 자신의 물질을 나누어주는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임하시면, [세계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뀌고 [물질관]이 바뀝니다.
성령이 임하면, 물질에 대하여 자유하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마음은 누군가 강요하거나, 부탁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고,
풍성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다.“(행4:33)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어서 32절과 34~5절에는 ”사도들이 자신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 여기지 아니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으면, 
①”큰 권능으로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고, 
②”어려운 이웃에게 물질을 나누어 주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또 한편으로 ”가난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 헌금을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을 구제하는 일이 우선이었기에, 
①복음을 전하는 일과 ②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했고,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바쳤고, 사도들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일들은 공동 소유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하자“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들은 [평등]이라는 ”이념을 내세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공동체였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념과 제도로는 불가능합니다.
요즘에 교육에서 내세우는 [평등]이라는 개념은 ”법과 제도“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교육부]에서 ”평등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도 보면, 너무나 한심합니다.
 
[좌편향 교육]으로, “골고루 평등하게 기회를 주자.”는 [평준화 정책]은 잘못된 정책입니다.
돌이켜보면 [평준화 정책]은 이론은 좋으나, 개인의 엄청난 잠재력을 둔화시키고, 
“[평준화]가 아니라, [평둔화]로 ”잘 하는 사람을 다 같이 후퇴시키는 정책“입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 사립학교들이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어요.
학교에서는 [종교학]을 배우는데, 그 종교학 교과서에 불교나 이슬람에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는데,
기독교는 단지 두 세 페이지에 불과합니다.
 
또 [출산율]이 저하되니까,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세워서 시행했지만, 출산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어느 종교가 출산을 장려합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성경을 가리키는 기독교 학교에서 어려서부터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가르칩니다.
 
제 생각으로, 기독교 학교에서 자유롭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그 결과로 ”[저 출산]이 지속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에, 몰려오는 [세속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나 홀로 주의“가 성행하다 보니,  
그렇게 해서 자라난 다음 세대들이 가정은 다 잊어버리고, 그 결과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결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저는 [평준화]가 초기에는 기여한 부분이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라의 잠재력을 잃게 만들고,  병들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평등]이라는 이념의 잣대”로 들이댄 것을 시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등]이라는 단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법과 제도로 이것을 실현하겠다.“는 것이 ”교육에 잘못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틀을 벗어나려고“, [자율형 사립학교]니, [특목고]라는 이름들이 나오는데, 그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령님이 임하시면, 각자의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초대교회]와 같이, 그런 축복받는 공동체”가 생기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정과 물질에 대하여 세 가지인데,
(1)첫째로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셨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질의 청지기로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만이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 [청지기]에 불과한 사람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둘째로 우리가 할일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겁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①주인이 시키는 것도 안 하는 종이 있고,
②억지로 하면서 시키는 것만 하는 종이 있고, ③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종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스스로 하는 모습이니까, [참된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독점]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3)셋째로 재물은 [욕심]이 아니라, ”필요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필요]와 [욕심]은 달라요. 
자신에게는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면 [욕심]일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욕심“을 필요로 가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필요와 욕심을 구분하는 것”은 도와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사람도 구분해야죠.
 
“나는 도움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욕심이면 한이 없는 것이기에, 
[평등]은 인간의 본질적 차이를 제도적으로 제어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랑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믿음 안에서 한 마음이 되었고, 서로 한 뜻이 되었으니, 자발적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①[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요, ②[독점]이 아니라, [나눔]이요, 
③재물은 [욕심]이 아니라, “[필요]를 채우는 모습”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놀랐고,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또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칭찬하였고 그들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4장 33절의 말씀에,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증언했고, 풍성한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 등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누구일까요?
이런 일에 모범이 되는 인물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36- 37절에,
“키프로스 출신인 요셉이라는 레위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도 불렀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의 밭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행4:36-37)
 
그는 사도들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으로 [바나바]라고 부릅니다.
[바나바]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자녀에도 여러 종류의 자녀가 있듯이, 속 썩이는 자녀가 있고,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을 닮은 자녀”라는 뜻이죠.
 
그것을 여기에 적용하면, [위로의 아들]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데 최고인 사람을 가리키고,
“그를 만나면, 누구나 위로를 얻는 사람이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므로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마다 위로를 얻는 사람이고, 그를 만나면, 격려를 받는 사람이었으니,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내놓는 사람“이었으니, 나눔을 실천 한 사람으로, 
그의 이름을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은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온 마음을 다해 주께 끝까지 충성하라.“고 모두를 격려했습니다.
 
[바나바]가 한 일은 ”위로의 사역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워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자책감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여, 절망감을 씻어 내고, 자책감을 씻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런 [바나바]의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에, [바울]의 곁에는 늘 [바나바]가 있었고, 
또 [바나바]가 [바울]을 세워 주었기에, “사도행전의 역사”가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물질]이지만, [물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바나바]와 같이, 사람들을 위로해 주면서, 격려해 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