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용서, 악을 선으로 바꾸다. (창45:1~8, 창50:15~21) 2023.12.17

다이나마이트2 2023. 12. 17. 13:45
 
용서, 악을 선으로 바꾸다. (창45:1~8, 창50:15~21)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래 전에 일인데, 스페인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갈등]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마드리드 신문사에,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찾는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습니다.
 
그 내용은 “사랑하는 아들아,  아버지가 모든 것을 용서한다.
”파코야, 내일, 12시 정오에, 신문사 정문 앞에서 만나자.”는 광고입니다.
 
그 다음 날 정오, 신문사 앞에는 “800명의 파코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름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갈등하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상처] 속에서 지내면서, 마음에 품고, 살아납니다.
 
[요셉]은 그렇게 많은 상처를 받았음에도, 가장 건강하게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용서했기에, 그 마음에 상처를 넘어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나타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22절에, ”요셉은 열매가 많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창49:29)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요셉의 인생]을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는 표현은 ”담을 뛰어넘는 가지처럼“,
[요셉]은 ”인생에도 장애를 뛰어 넘었다.“는 말씀입니다.
 
[형]들이 그를 미워하며, 미움과 질투의 화살을 그에게 쏘았으나,
“야곱의 힘 있는 사람의 손에 의해, 곧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도움으로 민첩하게 막았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담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해답은 “용서의 힘”입니다.
▶그것은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손으로, 방어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내용은 
①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온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이고, 
②아버지가 죽은 후에, 형들에게, ”용서해 주는 장면“입니다.
 
그동안 [요셉]은 형들 때문에 종살이를 했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했으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형들에게 복수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위상과 권세를 가진 [요셉]이 복수 대신에, [용서]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기 전에, ”밖에 나가서 통곡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니오고,
”그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처럼 “용서한다.”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분노하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용기]”가 필요합니다.
 
4- 5절에서,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며,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게 가까이 오십시오.
그들이 가까이 오자.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
하지만 형님들이 저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들보다 먼저 여기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창45:4~5)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용서]는 한순간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종살이를 하고 억울하게 감옥에서 13년을 보냈으니까,
그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분이고, 총리가 된 후 7년 정도가 흘렀으니까, 많은 세월이 지났어요.
 
그 기간에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던 것이죠.
형들에 대한 [용서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결단]은 짧은 순간에 할 수 있지만, [진정한 용서]에 이르기까지는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도우심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을 완전히 용서했습니다. 
 
▶그런 [용서]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고통의 세월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이루셨는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하시려고 저를 형님보다 먼저 여기도 보내셨고,”
7절에,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베푸셔서, 하나님께서 미리 저를 보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고, 저를 이집트의 통치자로 만드셨다.”고 솔직하게 고백을 했습니다.
 
▶[요셉]이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①자신이 [종]으로 팔려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있었다.”는 것이고,
②그 동안의 고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내 세우는 것은 
그것은 “곧 [가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지만.
[용서]란/ ”잘못을 눈감아주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50장 20절의 말씀에,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창50:20)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용서]란 무엇입니까?
①첫째로/ [가해자]가 행한 잘못을 명확하게 직시하는 것입니다. 
45장 4절에 보면, “저는 형님들이 이집트에 팔아버린, 형님들의 동생 [요셉]입니다.”라고 밝힙니다.
 
②둘째로/ [용서]는 “자신에게 가해진 상처를 분명히 말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잘못이 ”나에게 어떠한 상처를 줬고, 그로 인해서 자기의 감정이 어떻게 힘들었는지?“를 밝히고,
상대에게 확인해야 합니다.  
 
③셋째로/ [용서]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시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용서]는 자신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할 때, 용서가 가능한 것입니다.
 
[분노]를 감추고, 외면하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받는 용서와 우리가 남에게 베푸는 용서를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마태복음]의 말씀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마6:12)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면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같이”를 서로  연결하신 말씀입니다.
 
이 [기도]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주기도문]이 끝난 이후에, 해설을 붙여서, 예수님께서 다시 해설을 해 주십니다.
그것이 14절 1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7:14~15)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데,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용서를 못 받는 조건처럼 보이는 말씀이죠.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는다.“는 것은
”은혜의 복음과 배치되는 것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용서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용서의 복음]을 믿고, 체험하는가?”라고 물으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머리]로는 이해하고, [지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란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용서하지 않을 때,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용서]해도 가해자는 반성하지 않을 수도 있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을 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어둡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나를 가두고, 나에게 고통을 주므로, 언제나 피해자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힘든 일입니다.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것“은 더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은 ”용서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움]은 분노를 일으키고, [사탄]이 침투하고, 좋아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러나 [요셉]이 형들에게 복수했다면, 그건 인간다운 모습이지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복수하는 장면“은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느끼고, ”통쾌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 드라마에는 불륜과 복수가 많이 나옵니다.
 
17년 후에, 아버지, [야곱]이 죽었는데, [형]들은 난리가 났어요.
그것은 ”이제, 아버지가 죽었으니, 이제부터 [복수]가 시작 될 때가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요셉]이 마음이 아파서, 요셉이 막 울었잖아요.
그것은 [자신의 용서]를 믿지 못하고, “계속 의심하고 있으니”, 어이없는 거죠.
또 여전히 그렇게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한편으로 안타까운 것이죠.
 
그래서 형들이 불쌍해서 [요셉]이 울었어요.
19- 20절 말씀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용서를 선포합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님들은 저를 해치려고 [악]을 꾀했지만,
하나님은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창50:19-20)
 
[요셉]은 다시 한 번, [용서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악]을 [선]으로 하나님께서 바꾸신 것에는 [요셉의 용서]가 쓰임을 받았습니다.
 
만일에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지 않고, 복수를 했더라면, 그냥 인간다운 삶이지만,
“용서를 했다.“는 것은 위대한 결정입니다.
 
”[복수]를 한다.“는 것은 그냥 인간다운 거예요. 그러나 ”요셉이 용서했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원리]가 작동하여, [악]이 [선]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역사하여, 
우리가 쓰임을 받아, [용서의 통로]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고 사는 삶“이 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축복을 누리며, [용서의 통로]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