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십자가의 역설 (고전1:18-25) 2023.03.19

다이나마이트2 2023. 3. 19. 22:42

십자가의 역설 (고전1:18-25)  말씀: 이재훈 목사님
 
원래 [십자가]는 현대인들에게 결코 친숙해질 수 있는 [도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사람을 죽이는 “사형하는 틀”이고, “죽음과 수치의 상징”이기에,
우리에게 기분 좋은 의미로 다가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십자가]를 오늘 날 “장식품”으로 사용하면서,
그 십자가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1세기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감히 [십자가]를 그들의 “공동체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외곽에 있는 지하 무덤이었던 [카타콤]에 가보면, 곳곳에 ”물고기 문양“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상징으로 [물고기 문양]를 사용했다.”는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 문양]은 “헬라오로 익투스”인데, 그 [이니셜]을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약자로,
[물고기 문양]이 곧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십자가]가 교회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이마에 십자가 성호를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십자가가 공동체의 상징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①여러 [예언]을 통해서, ②여러 가지 [기적과 표적]을 통해서, ③또 [창조 세계]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히브리서 말씀의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라고 할 때,
그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신 아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념과 상상에서 나온 대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반드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죽음과 수치의 상징인 [십자가]를 ”어떻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역설]로밖에 설명될 수 없는 [복음의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역설]이라는 것은 [패러독스]인데, ”모순처럼 보이는 진리”를 말합니다.
일상적인 우리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모순]인데, “그 모순이 진리를 나타내는 것”을 가리켜,
[역설, 패러독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 또 [바울 서신]에 나타난 여러 영적 진리들이 다 역설의 형태로 주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무릇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지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면 얻을 것이오, 얻고자 하면 이를 것이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는 말씀은 우리의 삶 속에 파고드는 영적 진리입니다.
 
그 중심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가 역설]이기 때문에, 
우리가 적용해야 하는 모든 진리가 역설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역설]을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원래 [십자가]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가 얼마나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사형 방법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누구셨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십자가의 역사]에서 오늘 본문 2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합니다.
 
25절의 말씀에,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연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전1:25)
 
▶여기서 감히, “하나님께 어떻게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문자 그대로 “어리석고 약하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역설적인 표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보기에는 결코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어리석어 보이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선택과 같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내려놓고 사람이 되신 것은 끊임없이 높아지려는 권력욕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습니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신 것은
자신의 주변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가려서 사귀는 성공 지향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음]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며,
하나님은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지혜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상의 지혜로 볼 때,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곧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23-24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것이 유대 사람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며,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전 1:23-24)) 
 
▶사람들이 [십자가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표적을 구하는 것이며, 또한 세상의 지혜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초월적인 표적을 기대하고, 그런 초월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은 그 창과 칼에 찔려, 무참히 죽임을 당하심으로 죽어버리시는 그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상의 지혜]로는 믿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방식으로는, [십자가]를 어리석어 보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고린도]라는 도시는 지식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장 앞선 도시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유적들을 보면, 그런 화려함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분이 [구세주]라는 것이 어리석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눈에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당시에 헬라 사람들이 원하는 ”화려한 수사를 구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내게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지식, 그것은 다 배설물처럼 여겼다.”는 것은 “세상의 지식과 지혜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은 그분의 성품에 모두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만족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하여 형벌만을 가하신다면,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허락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에게 형벌이 가해지지 않고 그저 용서하신다면, [사랑]은 만족하겠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결코 허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성품의 충돌이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녀가 잘못할 때, 부모는 자녀를 꾸짖어야 합니다. 그렇게 꾸짖으면서도 사랑이 더 해져야 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갈등이 아버지 하나님께 잘 나타난 표현으로, 호세야 11장 8-9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떻게 너를 포기하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떻게 너를 넘겨주겠느냐?
내가 어떻게 너를 아드마처럼 하겠느냐? 내가 어떻게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바뀌어 내 궁휼이 뜨겁게 솟아오른다. 내가 내 진노를 쏟지 않고,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고, 사람이 아니며,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진노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호11:8-9)
 
여기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단어가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하셔야 되는 일과, 사랑 때문에 하실 수 없는 일이 계속 충돌됩니다. 
 
[십자가]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완전히 만족시키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한 사건 속에 완전히 이루어 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지혜]요,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로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지혜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절의 말씀에,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만일 여러분 가운데 누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렇게 해야 진정 지혜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고전3:18)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자기 꾀에 넘어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하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역설적인 어리석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세상에서 분별력 없이, “그렇게 어리석은 자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지식을 우리가 가졌음에도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왜, 어리석다.“고 합니까?
그것은 [이생] 만을 바라보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결론은 뭡니까?
그것은 ”[이생]에 집착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왜, 어리석다”고 합니까?
[세상의 지혜]는 자기의 많은 꾀가 [지혜]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자기 [꾀]가 많은 사람은 “결국에 자기 [꾀]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우직하게 바라보며,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가 [참된 지혜]를 따라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의 구원]은 이루어가고 있는 도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의 시제]를 세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①첫 번째 단계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단계입니다. 
예수를 처음으로 알고, 믿으면, “이제부터 첫 번째로 구원을 받았다.”는 단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를 믿으면,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다 끝나서,
그때부터 ”나는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②두 번째 단계의 구원으로/ 지금은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받아야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 단계가 지금, 우리가 지내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다시 설명하면, 여러분이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구명보트]가 다가와서 우리를 구출하여, 우선 죽음을 면하고 구출된 것이지만, 
”완전하게 살아났다.”고 안심하려면, 그 구명보트를 타고 육지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육지로 행하는 가는 도중”에 있는 거예요. 
 
③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단계로, 안전한 육지에 도착할 때가 되어야 “완전한 구출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어떤 상태입니까? 
지금 우리는 두 번째 단계로, [십자가]를 통해서, 바다에서 건짐을 받은 단계이고,
지금 우리는 [구명보트]에 타서 “육지로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구출되고 있는 중간이고, 완전한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정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온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풀리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우리는 어떤 문제이든지,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바라볼 때, “그 문제로부터도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장식품으로 사용하지 말고,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이 시대 상황 속에서 십자가의 역사를 하나님의 지혜로 바라보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체험하는 그런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