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소망 (롬15:8-21) 말씀: 이재훈 목사님
작년 2월 24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올해 2월 6일에는 투르키에 시리아에서 [지진]이 일어났고, 세계 곳곳에는 기근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은 [전쟁]과 [지진]과 [기근]으로, “종말의 징조”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로 받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귀를 막고 있는 어리석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말했지만, 지금의 미국을 보면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지구상에 가장 앞서가는 경제와 군사력에서는 앞서 가지만,
그러나 예전처럼 도덕적으로 존경이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청교도 정신]으로 시작한 미국은 사라지고, 살인과 범죄와 마약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도 [마약 청정국]에서 [마약 소비국]으로 급속하게 전환되어 가고 있고,
출산율은 0.78까지 떨어져 가니까, 이 속도로 가면, 수십 년 내에 나라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모두가 “이런 상태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노나 저항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거기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소망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에,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왜, [소망]이 없을까요?
그것은 세상 속에 파묻혀서 살아가고, 하나님 없는 사회를 추구할 때, 우리에게는 [소망 없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파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면,
그것이 “종말의 징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이 [위로의 하나님]이고, [소망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인 로마서 15장 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은
①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고, ②하나님 자신이 소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구원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4절의 말씀에, “무엇이든지 이전에 기록된 것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에 기록됐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 주는 인내와 위로로 인해,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에서,
▶이렇게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품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게 [소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확실함보다 불확실성을 말하거나, 미래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을 바라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그러한 단순한 정도가 아니고, 확실히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는 믿음입니다.
공산주의에서 [소망]이라는 단어를 매우 싫어합니다. 그것은 [소망]을 말하는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이지만,
우리 인생을 수동적으로 만들어서, 현실에 무감각 하게 만들고,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더 현실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소망 가운데서 늘 자신을 사랑합니다.
(2)두 번째로/ [하나님의 소망]은 모든 민족이 예수님에게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음식 문제와 절기 문제로 믿음이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품어야 된다.”고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된다.”고 더 깊은 의미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은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소망]을 비전으로 삼지 못하면,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망]으로 비전으로 삼으면, 다투고 분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교회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필요를 채우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가 될 때는 분열을 피할 길이 되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소망]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는 진정 [하나]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망]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이렇게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는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런 소망을 버리지 않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8절 9절에, 바로 그 말씀이죠. ”내가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해, 할례 받은 사람의 종이 되셨습니다.
이는 조상에게 주신 약속들을 확정하시고, 이방 사람들도 그 긍휼하심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방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주는 이 변화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3)세 번째로/ [하나님의 소망]은 성도들의 소망이 넘쳐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 생활 가운데,
모든 기쁨과 평강을 충만하게 하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흘러넘치게 하시기를 빕니다.“(롬 15:13)
우리 하나님이 [소망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도 [소망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소망이 흘러 넘쳐서, 전해지는 [소망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면, 소망이 이렇게 흘러나올까요?
그것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이고, 그는 [하나님의 소망]이 전해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선교]란 무엇입니까?
[선교]는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를 통해 열방으로 흘러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하나님의 소망]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13절의 말씀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여기에 ”빕니다.“라는 말은 ”기도합니다.“라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기도했을까요?
그것은 바울 자신이 ”그것을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였기에, 자신 안에 [소망]이 흘러넘쳐서, ”소망을 전해주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소망]이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것을 뭐라고 고백했을까요?
그것을 [은혜]라고 고백했어요. 오늘 본문 15장 15- 16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인해, 여러분에게 몇 가지를 담대하게 쓴 것은
여러분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은혜]는 나로 이방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로써 이방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일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돼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롬15:15-16)
여기에, 두 가지 차원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데,
①첫 번째 차원은/ 내가 무조건적으로 사랑과 용서를 받는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받는 은혜를 말합니다.
②두 번째 차원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통로가 되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쓰임 받는 은혜를 말하는데, 소망이 흘러넘쳐서 누군가에게 이 소망이 전해지도록 하는,
“통로가 되는 은혜”를 말합니다.
우리는 받는 은혜에만 머무는 경우가 있습니다.
쓰인 받는 은혜 내가 통로가 되는 은혜 나를 통해 소망이 흘러가는 이 은혜 바울은 이것을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왜, 사모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가 없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하나님의 소망]이 전달되어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것이 “쓰임 받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15장 20절에,
“나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복음 전하기를 열망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에 [열망]은 어떤 열망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소망]이 ”자신의 열망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보고, 소망을 품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바울의 [열망]”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소망]이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가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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