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판단이 아닌 사랑으로 (롬14:1-16) 2023.02.12

다이나마이트2 2023. 2. 12. 21:06

판단이 아닌 사랑으로 (롬14:1-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인간은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 [약함]을 “어떻게 나타내는가?”에 따라서, [강자]로 비춰지기도 하고, [약자]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강자]로 여기는 사람은 자신을 감추는데 성공한 것이고,
스스로 [약자]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 약함을 감추는데 실패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강자]와 [약자]를 구분 짓는 “기준 자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약자를 괴롭힘으로써, 자신을 [강자]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 [기준]을 “자신”이 세우고, 그 [판단]에 따라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제가 안타까운 것은 [믿음의 영역]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스스로 정한 기준에 따라, [강한 믿음]과 [약한 믿음]으로 규정하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초대 교회에도 이러한 문제들이 나타났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갈등의 원인을 보면, 이런 기준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무시하는 현상이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 사람들도 믿음이 강한 자로 규정되는 사람과 약한 사람으로 규정되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서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갈등의 문제들을 “복음으로 치유”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거나,
혹은 유혹에 쉽게 빠지는 미성숙한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약함]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있는 성격이 아니라,
양심의 자유도 없는 부분을 [약함]이라고 표현을 한 것이죠. 
 
[사도 바울]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강함과 약함을 구분하는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에 대해서, “복음 안에서 매우 공정하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서 3절의 말씀에서,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사람을 받아들이되, 그의 견해를 논쟁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으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못하는 사람을 없이 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롬 14:1-3)
 
여기서 [바울]은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혹시 “서로의 견해가 다르더라도, 서로 논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든 것을 먹으면 되고, 먹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을, 안 먹으면 되는 문제인데, 
그것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하고 논쟁하는 것은 갈등만 생깁니다.
 
이 [문제]는 각자의 양심의 자유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각자의 양심에 따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3절의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장애물을 두지 않기로 결심하십시오.“(롬 14:13)
 
이 말씀은 ”나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으나, 내가 먹는 것으로 인하여 누군가에게 불편하다면,
그 형제를 위해서 먹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로 인한 문제가 일어났어요. 
그러나 [음식]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 세워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고, 먹는다 해도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런 자유가 “연약한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4절에서,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고,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롬 14:14) 
 
그렇다고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는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 부정한 것이 되므로, “확신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제사상에 바쳐진 음식“에 대해 말들이 많았어요.
그것은 ”귀신을 불러온 음식이니까, 깨름찍 하니까 먹지 말자.“는 의견과
”비싼 고기이고, 단백질인데, 먹어도 괜찮다.“는 의견이 있었지요.
 
결국은 먹고 싶은 사람은 먹고, 먹기 싫은 사람은 안 먹어도 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먹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3-4절의 말씀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모두 선함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식]은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과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감사함으로 받게 하려고 창조한 것이므로,
“음식을 부정하다고 여기거나, 정결하다고 여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요즈음 우리는 [토요 주일 예배]를 신설하여, 예배를 분산하여, 모입니다.
사실 코로나 이전에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전통이지만, 반드시 그게 올바른 것도 아닙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시작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휴일]이 제정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종]들은 ”항상 일하는 날“이고, [주인]들은 ”항상 쉬는 날“이 계속되었지요.
 
초기 유대인들은 토요일 저녁에 모였고, 그것을 [안식일]로 지켰어요.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 식사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저녁 식사 전까지가 [안식일]인 셈입니다. 
 
그런데 역사와 문화가 발전되면서, 이제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고, 공휴일이 다양화되면서
어떤 사람은 월요일이 공휴일이고, 어떤 사람은 수요일이 공휴일이 되고,
원전이 있는 [바라카]에는 목요일이 공휴일입니다.
그러니까 목요일에 쉬는 날이니까, 목요일에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어요. 
 
결국,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인간의 습관“일 뿐입니다. 
만일에 ”일요일만을 주일로 해야 된다.“고 하면, 그건 ”안식일 놀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 온누리교회도 2,000천명 이상 참석을 하지만, 제가 규모를 반으로 줄였어요.
예배 인원이 많으면, 분산해서 예배를 보면 되니까, 더 효율적인 운영을 먼저 생각했어요.
 
[서빙고]에 토요 예배를 신설하니까, 너무 좋아요. 과도하게 수천 명 이상이 모이면, 주차도 걱정이 되고,
서로 만나기도 어렵지만, 이제는 예배 후에 곧바로 집으로 가지 마시고, 옆에 있는 공원에 가셔서,
교인들과 만나서 대화도 나누시고, 교제를 나누다 보면, 너무도 좋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저는 중요한 원리를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1) 첫째는/ ”주님을 위해서 행동하는가?“입니다.
 
 14장 6절- 9절의 말씀에, ”어떤 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주를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먹는 사람도 주를 위해 먹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먹지 않은 사람도 주를 위해 먹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고, 자기만을 위해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든지 살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는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주가 되시기 위함입니다.”(롬14:6-9)
 
여기에, “주를 위해”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는 주의 것”이 되었으므로,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나 어떤 [나]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중요한 것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주의 날이라“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고, [주님]을 예배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형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주의 날“이 아닙니다.
그렇듯이 ”먹는 자“는 먹지 못하는 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은 ”주의 태도“가 아닙니다.  
 
(2)두 번째 원리는 ”사랑을 따라 행동하는가?“입니다.
 
이어서 15- 16절의 말씀에, ”만일 음식 문제로 여러분의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그 형제를 음식 문제로 망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롬14:15-16)
 
여기서 ”사랑을 따라 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린도서 8장에서도 동일한 맥락이 나옵니다. 8장 1절에 보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모두를 이롭게 합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12- 13절에도, ”이와 같이 여러분이 형제들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에 상처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넘어지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입니다.“(고전8:12-13)
 
이 말씀은 ”누군가를 판단하는 [지식]은 교만한 것이지만, 형제의 양심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사랑이 있다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나의 자유가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자유를 스스로 내려놓는 것“이 더 큰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판단을 따라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랑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말고, 사랑을 따라 행동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