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누구를 찾고 있느냐? (요20:11-18) 2023.01.10

다이나마이트2 2023. 1. 10. 10:00

 

2023 새벽기도[30일차] 누구를 찾고 있느냐? (요20:11-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가장 가난한 여인으로 알려져 있는 여인입니다.
 
이 이름에서 “막달라”는 [성]이 아니라, “지역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름 앞에 “지역 이름”을 넣어, 그 사람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이름도 “나사렛 예수”라고 “나사렛 지역에 사는 [예수]”라고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에 들렸던 여인으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겼던 여성 제자로써, 십자가에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가까이 있었던 여인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처형 당시의 상황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장면들이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숫자로만 다섯 명”이라고 기록하고, 그중에 4명이 여성이고, 한 명이 [요한]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에 “남성 중심의 문화”이지만,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교만했던 [베드로]등,
주축이 되는 제자들은 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성 제자들이 십자가 처형장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처형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곧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멀리 숨어서, 처형 광경을 보는 사람과는 “그 사랑과 헌신의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여인이니까,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있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이 끝나고 난 이후에, 바로 [안식일]이 시작이 되어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본래 당시의 관습으로는 “십자가 처형을 당한 죄수의 시신”은 골짜기에 버려지거나,
동물들의 먹이로 버려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러니까 [무덤]이 필요 없는데, “아리마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돌무덤을 제공하여, 그곳에 안치했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도록 한 것입니다. 
어찌되었건, 예수님의 시신이 비싼 무덤에 안치되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일어났어요.
돌무덤에 안치되려면 시신이 수습이 돼야 하는데, 준비된 향품도 없었으므로, 그냥 돌무덤에 안치하고,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고, 군병들을 동원해서 지키도록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상황을 지켜보았기에, 안식일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여인들과 함께 그 무덤을 찾아 온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밤이 새도록 잠을 못 이루고, 새벽에 동이 트자마자 여인들과 함께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돌문이 열린다.”는 보장도 없었으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도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고, [헌신]입니다.
이것이 끊을 수 없는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도착해 보니, [돌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돌문을 열었는데, 지진이 일어나고, 그 땅이 진동하면서 돌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문이 열린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나오시도록 돕기 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간 여인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소원이 있으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응답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돌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문이 닫혀 있던지, 열려 있든지, 아무 상관없이 부활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살아야 나신 분이니까, [돌문]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돌문]이 닫혀 있었다면,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니까,
그래서 무덤이 열렸고, 사람들이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일 먼저 [빈 무덤]을 목격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인 몇 명이었고,
두 번째로 [빈 무덤]을 목격한 증인은 [베드로]와 [요한]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조가 됩니까? 
[베드로]는 무덤이 비었는데, “집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갈 수가 없어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으니,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사랑의 깊이에 대한 차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제자들 가운데, 가장 깊이 사랑한 제자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 택하신 여인”이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여자]의 증언“을 법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그 당시에 [여자]는 법적 효력을 가지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여인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택하셨다.“는 기록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 기록이 사실이라”는 방증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렇게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첫 증인이 되었다.”는 것은 “[부활이 진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직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빈 무덤]을 보고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 위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사건”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서서 울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 무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 [빈 무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이겨내고, 부활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빈 무덤]은 “슬픔의 장소”가 아니라, 이제는 “기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만난 헌신된 주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지만,
“여전히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그냥 아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확실히, 분명히, 정확하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빈 무덤]을 눈으로 확인하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도마]는 “내가 직접 만져보고,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믿기 어려운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고, 우리에게 놀라움이고 두려운 사건이었습니다.
 
▶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까?
그것은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나온 성도들이 놀란 표정이 없기 때문이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놀라지 않는데, 어찌 세상 사람들이 놀라겠습니까?
 
“예수님 부활하셨다.”고 플랜카드는 붙여놨지만, 성도들이 놀라워하는 표정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믿겠습니까?
사람들은 구호는 보지 않고, 표정만 보고 있어요.
 
우리가 내세우는 [구호]가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들의 삶의 변화를 보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평가하기 때문이지요
 
[막달라 마리아]도 그 때는 아직 예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이 왜, 비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4- 15절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예수께서 거기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신 줄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나 왜, 울고 있느냐? 네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는 그 사람이 동산 지기인 줄 알고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그분을 옮겨놓았거든 어디에다 두었는지 말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분을 모셔가겠습니다.”(요 20:14-15)
 
예수님께서 “여인아,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말씀하셔도 [마리아]는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체의 [몸]”으로, 변화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함께 동행을 하였지만, 예수님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식사할 때,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온전케 되신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현재 모습이 자기가 보기에는 잘라 보여도, “온전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연약한 모습”이지만, 부활하게 될 때는 우리의 모습도 변화 되어,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6-17절을 보면, “예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그때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를 만지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갈 것이다.’라고 말하여라.”(요20:16-17)
 
여기에서 “나를 만지지 말라.”는 것은 “나를 터치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에게 매달리지 말라.”는 의미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나의 상태로, “깨닫는 것에 멈추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너는 나를 이전의 모습으로만 알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나는 십자가에서 부활한 존재이고, 아버지께로 가야 되는 상태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죽음에서 다시 산 자이고, 아버지께로 갈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나는 십자가를 지기 이전에 내가 아니다. 
나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제 아버지께로 가는 존재가 되었으며,
내가 아버지의 때에 다시 올 것이므로 “나를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십자가에 죽음 당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도 일어날 것이고, 나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실]을 “가서, 사람들에게 알려 주라.”는 말씀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과 헌신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가장 먼저 나타나 주셨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깊은 사랑으로 주님께 나아가면, 누구나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