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장 31절) 2022.12.28

다이나마이트2 2022. 12. 28. 16:40

40일 새벽기도[17일차]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장 31절), 말씀: 김영련 목사님
 
오늘은 한동대를 시작할 때 초대 [교목]으로 섬기시다가,
미국에 가셔서 [산호세 온누리교회]에서 목회하시다가 은퇴한 김영련 목사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앙]을 각자 가지고 있고, 그런 신앙의 자유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진짜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 앞에, 말문이 막히기도 합니다.
저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고, 교회 생활을 오랫동안 해 온 사람으로,
“어떤 것이 정말 예수를 믿는 삶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저는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자라서 큰 복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것이 저와 주님과의 관계를 자동적으로 맺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생활은 “마치 물고기가 어떤 어항 속에 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저에게도 주님과의 만남”이 필요했고,
하나님께서는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런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교회 생활이 저의 학교생활보다 더 비중이 컸으므로, 학생회 회장도 지내고,
시골 교회이므로 교사가 부족하니까 [교사]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어릴 적에 음악을 배웠기 때문에, 성가대 지휘도 하게 됐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을 공부했는데,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가는 학문”이므로, 
[진리]를 찾기 위해서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를 가져야 한다.”는 훈련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야 “확실한 걸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깊은 회의를 하고, 의심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도 제 몸은 계속 교회 안에서, 교사로, 지휘자로 봉사하고 있었어요. 
 
몸은 교회 안에 있었지만, 사실 마음 안에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로 청년시절을 보냈고,
그러다가 군대를 가게 되었으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까, 거기서 진짜 제 신앙이 드러나게 되더라고요. 
 
그것은 교회를 가고 싶었지만, 군대 안에 질서도 있고, 선임자의 허락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어요.
 
그 때 제 생각은 “교회에 꼭 나가야 될 이유”를 찾지를 못해서, 거의 1년을 교회에 가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제가 근무하던 부대에 한 [군종병]이 전입을 왔는데, 그분이 저에 대해서 관심을 보여서,
그때부터 교회도 다니고, 봉사도 하게 되었어요.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대해 주었고, 그분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를 얘기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성경을 같이 읽자“고 해서, 그거는 내가 늘 하고 싶다가 실패했던 것 중에 하나이므로
”네, 좋다.“고 생각하여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읽는 게 아니라, [계획표]를 만들어서 ”매일 세 장씩 규칙적으로“,
삼칠 이십일로 한 주면은 스물한 장이 되고, 4개월 4주니까 평균 한 달에 80장을 읽게 되더라고요.
 
저는 옛날에도 새해가 되면 성경읽기를 시작하는데, 항상 창세기부터 통독을 시작하다가,
[레위기]쯤 가서 포기했는데, 이번에는 안 멈춰지는 거예요. 
 
▶이유는 뭡니까? 그것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했기 때문“이지요.
서로 좋은 의미에서 격려해주고, 또 어떤 면에서는 서로 감시도 하게 되었어요.
 
그 때, 제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어떤 한 구절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 구절이 뭐냐면 바로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인데,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당하는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는 [십자가]는 멸망 받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인데,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바보같이 보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꼭 붙잡아야 할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그 말씀이 저를 사로잡았어요.
그러니까 이 [십자가의 도]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그게 무슨 말씀인지?”를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 바로 이거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셨지,
그 [십자가의 진리]를 나에게 말씀하는 하는 구나“를 느끼며,
 
그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어 보였으나, 그 앞에 멸망 받을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동안 내가 멸망 받을 사람의 길에 서 있었구나.” 그거를 제가 그때 깨달았어요. 
 
당연히 내가 멸망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내가 죄인인 것도 고백하게 되었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할렐루야, 그렇게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서 동시에, “저에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러면서 누가 뭐라고 말을 해주지 않았는데도 ”내가 거듭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중에 [요한복음]을 보니까, 거기에 [예수님]과 [니고데모]라는 사람의 만남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니고데모]한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는 구절이 마음에 박혔어요.
 
나는 내가 예수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이런 [거듭남]의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어려움이 왔을 때, 교회를 못 가는 환경이 됐을 때,
“내가 그것을 뚫고 나갈 [힘]이 없었구나.“라고 반성을 하며, 그때 내 마음이 변하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이제는 내가 새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을 보니까 거기에 확실한 말씀이 나오더라고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뭐가 되나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이전 것(=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됐습니다.“(고후5:17)
 
그때 ”나는 비로소 진짜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저는 분명히 거듭났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한동안 정말로 구원의 감격과 기쁨 속에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점점 식어지고, ”다시 내가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했어요.
 
나는 분명히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났는데, 그래서 ”거듭났다.”고 좋아했는데,
그런데 그런 나의 신앙생활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랍고도, [괴로운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확실한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욕심이 많고, 게을러지고 싶고, 남을 미워하게 되고,
물론 겉으로 막 싸우거나 그러진 않지만 속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그리고 “내 안에는 욕심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경을 계속 읽다가 “사도 바울도 그런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로마서 7장 15절에 보면, “나는 내가 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씀에 공감이 됐습니다.
 
“아~ 그래서 내가 갈등을 격었었구나?”라고 생각햇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자동 프로그램처럼 이어져 나가는 게 아니고, “내가 노력해야 얻어지는 것이구나“를 느꼈습니다.
 
[신앙생활]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면, ”내가 믿기만 하면, 나도 성자가 됐을 것이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러면서 제가 발견한 말씀이 “고린도전서 15장 31절“의 말씀입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내 자랑인 여러분을 두고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이 [말씀]은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오늘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이 구절이 사실은 ”부활에서 나온 말“이에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라고 하는데, 부활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부활에 대한 이야기 속에, [바울]이 “내가 날마다 죽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거듭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변화된 [사도]인데,
”그런 사도 바울이 매일 죽어야 한다.“고 고백한 것은 ”우리에게도 매일 매일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매일 매일] 꾸준히 그렇게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앞에 ”날마다“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날마다] 그랬고, 사도 바울도 [날마다] 그랬어요.
 
이 말씀은 [복음서]에도 나오고, [서신서]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장 훌륭한 제자라고 인정하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이해하지 않겠어요? 
 
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왜, [죽음]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일까요?
그것은 살기 위해서 “먼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마지막에는 부활하셨지만, 부활 전에는 뭐가 있었나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음”이 있었어요.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는데도 죽으셨고, 그렇기 때문에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위해 죽음을 택하셨고,
그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죽음”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깨달았던 [진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나의 죽음”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온누리교회에 오셔서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하면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서 나도 같이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는 것이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먼저 깨닫고, 우리에게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요? 예를 들면, 
①[나의 고집]이고, [나의 신념]을 매일 죽여야 합니다.
②[나의 자존심]과 [나의 주장]을 매일 매일 점검하고, 죽여야 합니다.
③[나의 욕심]과 [나의 나쁜 생각]을 매일 매일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는 과정 중에도 우리는 이런 [죽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지키다가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영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정말로 육체적으로 자기 몸을 죽였어요.
그들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죽었지만, 우리 모두가 순교자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도 영적인 죽음이 필요한 거예요.
 
그때 우리는 사실 어떤 면에서 한 번 죽은 거예요. 
우리 교인들이 같이 우리의 편안함에 대해서 편리함에 대해서 포기하고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포기]가 있고, 거기는 거기에는 양보가 있고, [죽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우리 기독교 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죽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생명의 길이고, 축복의 길인 동시에, “포기의 길”이고, “양보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길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의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언젠가는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니라, 거기에도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생]은 죽은 다음에 부활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도 영생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아요. 
물론 그건 엄청난 축복이고 특권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아의 부인]과 [자아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선언했어요.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과 행복을 추구한다면, 아마 우리는 쉽게 죽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한 번 죽었어요.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은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거듭남]을 경험했지만, 자동적으로 선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큐티]하고, “나는 날마다 죽었노라.”라는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