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예수 40일 새벽기도 말씀

거룩과 진리 (요17:17-19) 2022.12.23

다이나마이트2 2022. 12. 25. 18:49

40일 새벽기도[12일차] 거룩과 진리 (요17:17-1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거룩]과 [진리]”라는 주제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 또는 영어로 [크리스천]이라고 부르지만, 
신약성경에는 그 단어가 세 번 밖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때, [성도]란 “거룩한 사람”이나,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직분]을 받는 것을, “[성도]에서 승급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모두를 부르는 용어는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직분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자신을 소개할 때,
“저는 아직까지 성도입니다. ”라고 표현하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직임을 갖고, 은사에 따라 헌신하는 [성도]입니다. 
 
목사인 저도 [성도]이고, 여러분도 [성도]이니까, [성도]라는 호칭은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우리 모두 [성도]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그리고 또 없어져야 하는 호칭이 “저는 아직 평신도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성도를 평신도와 특신도를 나누는 것도 잘못입니다. 목회자도 성도이고, 직분이 있어도 성도이고,
또 직분이 없더라도 성도입니다.
 
오늘은 [거룩]이라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거룩]이라는 의미는 매우 폭넓게 사용됐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고, 하나님이 임재 하는 장소와 제사에 대해서도 “거룩하다.”고 말씀하셨고,
심지어 전쟁까지도 “거룩한 전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을 [거룩]이라고 표현하며, 
구약에서도 그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제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을 때, 
그것을 우리는 [칭의]이라고 하고, 이것은 “선언적인 의미로  [거룩]을 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캐톨릭에서는 “성인 의식이라”는 게 있는데, 어떤 성자가 성인으로 대우를 받는 [세인트]라는
“성 아무 아무개”( 聖◯◯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선언적인 거룩]입니다.
 
그리고 [칭의]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이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그것은 [실천적인 거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이 선언하시는 거룩과 이제 실천을 통해 거룩에 도달하는 
“성화의 과정” 속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실 때, 
“진리로 거룩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과 1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17절에서,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19절에서,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씀을 종합하면, “예수님께서 진리”이고,
예수님은 “내가 곧 진리이고, 진리의 성령님이다.”는 것이고,
또 오늘 말씀에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의 말씀이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하신 말씀도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의 기도에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첫째는/ 우리가 진리로 거룩해질 때는 “이 세상과 구별된 기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17장 13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그들 속에서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 17:13)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6장부터 ”이 기쁨에 대해서“ 계속해서 언급을 하셨습니다.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된 사람은 ”예수님 안에 있던 [기쁨]을 함께 누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거룩]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우리가 ”거룩하다.“고 하면, 경직이 되고, 규칙을 어기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만,
우리는 일단은 ”세상과 다른 구별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출산에 비유하여, ”너희가 슬퍼하게 될 것이나,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 때문에, 더 이상 그 고통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도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지금은 슬퍼하지만, 내가 너희를 다시 볼 때 너희는 기뻐할 것이고,
너희 기쁨은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인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있지만, 그 고통이 변화의 기쁨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은 우리가 진리로 거룩해질 때,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고통을 참으실 수 있었던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니까, 거룩한 사람은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되지요. 
 
그러므로 [거룩한 예배]는 “기쁨이 넘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도, 슬픔 속에 있는 사람도, 세상 속에 실패와 낙심 속에 있는 사람도
예수님의 기쁨이 충만하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함을 누리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로 거룩함을 이루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이와 같이 [거룩한 의미]로, 과거에 한국 교회에는 어떤 제도적인 장치나 행동으로, 
거룩을 추구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강대상 위에 올라 갈 때,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게 하는 경우죠. 
아직도 성도들은 구두를 신고 있는데, “강대상에서 슬리퍼 착용을 의무화하는 교회들”이 있어요.
 
그런 전통은 예전에는 “비포장도로의 길“이 많았기에, 신발을 신고 올라가면 진흙이 떨어지므로,
신을 벗고 올라갔지만, 지금은 그게 참 거북해요.
 
그것은 한 마디로, [거룩]이 아니라, 거북해요.
오늘날에는 신을 신는 게 [예의]인데, 시대적 문화적인 의미를 잘못 적용한 것이니까,
우리가 만들어 놓은 ”제도와 문화를 지키는 것을 거룩하다.”고 하면 그건 아니지요.
 
우리는 교회에서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을 누려야 하고, 그런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2) 둘째로/ 진리로 거룩해 질 때, “세상의 악에 빠지지 않고, 보호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4-15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달라는 것입니다.”(요17:14-15)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 속에 살아갈 때, 부딪치는 악의 위험을 보고 계시는데, 
“세상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고, “영적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악의 위험이 있고, 특별히 대학 청년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진리에 순종하며 살 때,
나의 자유를 잃어버리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받으려면, 말씀인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고, 그것에 순종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악]이 [선]으로 포장하니까, 그 교묘한 악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셔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대학 청년들은 미래를 스스로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미래가 따로 있습니다. 
 
(3) 세 번째로/ 진리 안에서 거룩해 질 때,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헌신하게 됩니다.
 
앞에서 [거룩의 목적]은 “구별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존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쓰임을 받는 것이 적극적인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8-19절의 말씀에,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보냅니다.
그들을 위해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18-19)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냅니다. 
여기서 [거룩]이란 세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은 일차적으로 구별되는 목적이 있지만, 무엇을 위한 구별입니까? 
그것은 구별을 위한 구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쓰임 받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거룩]이란 “악에 빠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립과 분리]가 아니라, “접촉을 통해 영향력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고 했을 때, 
그것은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소금이 소금 부대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소금의 의미]가 없어요.
그때, 소금은 부대를 벗어나서 소금으로 뿌려 질 때, 그 썩는 물질에 붙어서 소금의 영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악]을 치유할 수 있는 그것이 거룩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사 선생님에 비유하면, “의사는 끊임없이 병자들만 만나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그건 의사가 아니지요.
 
이와 같이 [교회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목적을 이루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 땅 끝까지 세상의 문제 속에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악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랑을 행하는 것으로, 세상 속에 파송 받아 하나님께 쓰임을 받아야 합니다.
 
요즘에 새벽마다 듣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가 날마다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