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토기장이와 진흙 (롬9:19~33) 2022.11.06

다이나마이트2 2022. 11. 6. 16:24

토기장이와 진흙 (롬9:19~33) 말씀: 이재훈 목사님
 
지난주에 이어서 [로마서 9장]은 예정 신앙에 대한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까지는 구원의 복음에 대한 말씀이고,
로마서 9장부터는 구원받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깨닫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모든 것이 다 정해져 있기에,
“인간의 선택이나 노력이 소용이 없다.”는 [결정론]이나 [운명론]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믿게 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믿지 않으니까, 우리가 믿으라고 권하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고,
또 하나님이 믿도록 예정하신 사람은 내버려 두어도 하나님이 다 믿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오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더욱 깊이 알고, ”더 깊은 선교의 열정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9장을 시작하며,
동족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큰 근심과 고통을 느낀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동족 이스라엘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것이기에,
”자신이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운명론을 가졌더라면, 이런 마음을 왜 들겠습니까?
 
또 10장 1절에서,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인간의 모든 노력으로 하나님의 예정이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된 예정 신앙]은 선교적인 신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주 본문 9장 전반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질문에 대답을 하였습니다.
거기에 두 가지 질문을 던졌어요. 
 
(1) 그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안의 이스라엘이 내게 주어진 관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라고 해서, ”모두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①앞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②뒤에 나오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게 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사례를 제시했습니다. 
①첫째는/ 아브라함의 두 자녀, [이스마엘과 이삭]입니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지만,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가 아니기에, 그는 이스라엘로 분류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자녀이기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이삭]의 우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약속을 따라 태어났느냐?“의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②두 번째로/ 이삭의 두 자녀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자녀일지라도, 하나님은 [애서]가 아닌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배 속에 있을 때 어떤 행위나 인격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야곱]을 먼저 택하심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약속을 따라 이스라엘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①그러므로 ”동족 이스라엘 안에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고, 
② ”이방인 가운데에도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이런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사람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불의하심의 증거가 아니냐?”라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고, 구원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구원받아야 마땅한데, 그러나 “일부만 선택하셨다면, 불리하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심판받아 마땅한데, 왜 모두를 구원하지 않고 그 가운데 선택한 사람들에게 긍휼하심을 주느냐?”라고
말할 때는 불리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에 이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먼저 택한 이들을 통해서,
남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구원이 전달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제 지난주에 이어서,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긍휼이 임하지 않는지, 그것이 왜 불의한 일이 아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마지막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공유하며, 어떤 이들은 완악하게 한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이 악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심판받아 마땅할 정도로 완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 대한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도전하며 반기를 들 수가 없습니다. 
 
20절의 말씀에,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말대답을 한단 말입니까?
지음을 받은 것이 지은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대들 수 있겠습니까?(롬9:20)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말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토기장이와 진흙]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21절의 말씀에, “토기장이와 진흙 한 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막 사용할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롬9:21)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귀하게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은 천하게 창조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창조하셨고, 어떤 사람은 죄 짓고 정죄 받고 심판받도록 창조하셨던 뜻도 아닙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을 비유로 사용하신 것은 창조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믿도록 창조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믿지 않도록 창조되었다.”는 [운명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진흙]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흙을 창조했다.”고 말하지 않고, “진흙을 가지고 그릇을 빚으셨다.”고 말했어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할 때, “그 창조물에게 운명을 정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진흙]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릇]으로 빚으셨다.“는 것을 설명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진흙덩이]는 뭐를 의미하나요? 
그것은 ”창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되었던 상태이지만, ”타락한 인간의 상태“, 
즉 ”하나님을 떠난, 진흙덩이와 불과한 인간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기에,
하나님은 지옥에 갈 심판받을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흙 덩어리와 같은 타락한 인간을 그릇으로 빚으신다는 귀하게 쓰일 그릇과
막 사용하는 그릇으로 만드실 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들, 하나님의 심판받아 마땅한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은 존재를,
하나님께서 그릇으로 빚으시든, 아니면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진흙 덩어리로 버리시든, 
그것은 “하나님께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우리들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는 귀히 쓰는 그릇으로 빚지 않았느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됐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흙 한 덩어리와 같이 타락한 우리들은 구원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십자가가 필요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이에게는 베풀지 않는 것이 “불행한 일이 될 수 없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많은 유대인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0절에서 32절 우리 같이 읽어볼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의를 따르지 않는 이방 사람들이 곧 믿음으로 인한 의를 얻었으나,
의의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입니다.“(롬9:30-32)
 
그들은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은 믿음으로 의를 얻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행위로 의를 얻는 것처럼 행했기 때문에,
”걸려 넘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받은 자들이 ”그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거예요. 
[율법의 목적]은 그 율법 앞에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고,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걸 깨달으라.”고 율법을 준 것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율법을 가지고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처럼 만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라고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많은 유대인들을 버리기로 작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들기를 원하는 그들의 완악함 때문에, 스스로 걸려 넘어진 거예요. 
 
길을 가다가 우리도 가끔 돌에 부딪히면, 애매하게 돌에게 화를 내지요.
이와 같이, 자기가 걸려 넘어져 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은총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긍휼의 길을 열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기의 완악함 때문에,
죄악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져 믿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멸망 받는 책임은 “우리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겁니다.
또한 우리 자신의 완악함을 고집하고, 그 사랑을 거절하고, 스스로 의롭다 하는 자는 결국 멸망하게 돼 있습니다. 
 
지옥에 가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긴 사람들만 모여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잘났고, 자기만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모이면, 거기가 [지옥]이지요. 
 
교회 안에도 그래서 지옥을 경험하는 거예요. 
어떤 교회는 사람들만 모이면, [겉]은 교회인 것 같지만, [속]은 지옥같은 곳이 있어요.
 
그런 곳에는 “갈등과 싸움”이 끊이지 않아요. 
그런 곳에는 “스스로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곳은 “하나님께서 구원받도록 창조하신 곳”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며,
그러나 끝까지 완악함에 빠져 있는 자들은 멸망하시도록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잃어버린 영혼을 향하여 더 간절히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9장]의 핵심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