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하며 기도하라 약5:7-2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은 야고보서의 마지막 결론 부분으로, [참된 믿음]에 의해 나타나는 삶의 행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결론]은 야고보서 1장에서 말씀하셨던 내용을 다시 강조하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즉,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그 시험 가운데 인내하라.
그리고 만일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교훈] 속에 담겨진 핵심 내용은 바로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핍박 가운데 흩어져 있었던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오래 참음 가운데, 인내하며 기도하라.“는 교훈입니다.
이러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신앙“은 기도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5장 6절의 말씀을 보면, [의인]들의 반응은 ”여러분은 의로운 사람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당한 불의한 방식으로, 대항하지 않았어요.
이걸 보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교훈이 성도들에게 전해지고, 또 실천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전체를 보면, 부분 부분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연상하게 하는 그런 말씀들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산상수훈의 말씀이 ”그저 한 번 지나가는 연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장 7절의 말씀을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십시오. 보십시오. 농부는 땅의 열매를 참고 기다리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립니다.“(약 05:07)
[참된 인내]란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분노를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될 날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살다보면, 세상의 불리함에 대하여 왜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로는 해결될 수 없고, 분노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표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에, ”믿음으로 인내를 먼저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고보 사도가 두 번씩이나 ”주님의 재림이 매우 가까이 임박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8절에서 ”주의 강림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고, 9절에도 ”심판자가 문 앞에 서 계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 이런 [기다림]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에 대한 [기다림]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는 추수의 때요, 심판의 때입니다.
그 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때이고, ”그분이 바로 문 앞에 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도 “볼 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03:20)
여기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은 한가하게 두드리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절박한 마음에서 임박한 진로에서 두드리는 분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도처의 지진이나, 전염병. 또한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모습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임박한 심판의 전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말씀하신 [종말의 때]에 대한 증상들을 보면, “앞으로 이러한 증상들은 완화되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고, 오히려 더 악화될 것으로 예견됩니다.
하루가 천 년 갖고, 천 년이 하루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른 것뿐입니다.
그것은 천 년을 하루같이 참으신 [하나님의 인내]가 있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그 이후에 2021년이 지난 거예요.
지난 2천년의 세월은 하나님은 [이틀]처럼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후 3천년이 되더라도,
그것은 “[우리]는 너무 긴 세월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하루처럼, 천년을 여기시며” 참으시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 앞에 서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재림]은 매우 임박했고,
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수많은 현상들은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내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를 부정적이고, 또 수동적인 기다림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오래 참고, 인내하라.”고 하면, 굉장히 무능해 보이고, 또한 마치 힘없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만,,
[농부의 인내]를 예를 들며 설명하셨습니다.
5장 17절의 말씀을 정리하면, “농부는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기다리며,
이를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기까지 기다립니다.”
이러한 [농부의 인내]는 열매를 기다리는 [긍정적인 인내]입니다.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에는 분노가 가득할 리 없습니다.
[조급함]은 가질 수 있겠지만, 그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리 없습니다.
[농부]는 열매를 생각하면, 자신의 모든 피곤이 사라지고,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인내력이 생기기 때문이죠.
이것이 “열매가 가져다 이익”이고, “긍정적인 에너지”입니다.
▶[농부의 인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로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인내가 아니라,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농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면서, 할 수 없는 일은 기다리는 것이죠.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또한 비료를 주고, 잡초를 뽑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는 거예요. 그러나 [햇빛과 단비]는 농부가 만들 수 없어요.
농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인내의 풍성한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농부의 인내]에서 [욥의 인내]를 더 추가해서 말씀하십니다.
▶[욥]의 인내는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해,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거예요.
[고난의 끝]이 어딘지, 원인도 알 수 없고, 결과도 알 수 없는 고난이 바로 [욥의 고난]이었고,
그 가운데 인내한 것이 [욥의 인내]였습니다.
그러니까 [농부의 인내]보다, 훨씬 더 한 차원 높은 강도가 ”[욥의 인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원인도 모르고, 결과도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욥]이 보여준 ”믿음의 태도“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욥]이 받은 고난은 세 단계에 걸쳐서 나타났어요.
①첫 번째 고난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자녀와 모든 소유가 한꺼번에 상실해 버렸으니, 엄청난 고통이죠.
자녀와 종들이, 모든 소유가 한꺼번에 상실되는 고통 앞에 직면한 것이지요.
②두 번째 단계의 고난은 자신에게 혹독한 질병이 나타나서, 온몸의 악성 종기가 발생했어요.
오늘날에도 이런 악성 종기는 다루기가 힘들지만, 그 당시에 [악성 종기]란 “곧, 죽음에 이르는 질병“을 의미했어요.
▶그때 [욥]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바로 그때, [욥]의 아내는 ”그 인내심을 버리라.“고 하면서, ”차라리 하나님을 원망하라“고 저주합니다.
③세 번째 단계의 시험이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데, ▶그것은 뭘까요?
그 상태가 오래 지속이 되는 거예요. 그 인내가 인내 자체를 시험하는 거예요.
오랜 시간으로 고통이 오래 지속되면, 인내의 한계가 오기 마련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단계 시험에서 승리하였던 [욥]의 인내가 세 친구가 와서 위로한다고 하면서,
하는 말들이 그를 더욱 힘겨운 시험에 빠지게 했습니다.
야고보 사도에게 별명이 하나 잇습니다. 그것은 [낙타 무릎]이라는 별명입니다.
그가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에, ”무릎에 못이 박힌 모습으로 변했다.”고 해서,
그 모습을 “낙타 무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는데, 그 “행함의 모습”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는 “항상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14절 이하에서, “기도할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①그 상황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을 때”입니다.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고난은 아니지만, 막상 고치기 어려운 질병을 만날 때,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받게 됩니다.
어떤 질병이 찾아올 때, 내 믿음이 더 좋아지면 참된 믿음의 인내 속에 있는 것이고
믿음이 사라지거나 없어진다면 실상 참된 믿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5장 14절에서 16절의 말씀에, “여러분 가운데 병든 사람이 있으면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붓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낫게 하실 것이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며 병나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약5:14-16)
장로들을 초청해,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붓고 기도하라.
여기서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당시의 의미로 볼 때는 의학적인 치료라는 거예요.
당시에 [약]이 보편화되지 않았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기름]으로 치료를 대행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난하여 기름조차 살 수 없는 이들은 교회 공동체 또는 교회 장로들이 함께
그런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17절에서 18절의 말씀에,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3년 반 동안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땅이 열매를 냈습니다.”(약5:17-18)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것은 그 시대에 [바알 신]을 숭배하는 때라,
“[바알 신]이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바알 신]이 비를 내려다 준다.“고 믿었던 시대였기에,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3년 동안의 기근을 주어서, ”누가 비를 내리는 분인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셨어요.
우리에게 진정 [비]를 주시고, 햇빛과 단비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걸 깨닫게 하기 위하여 [엘리야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기도해야 할 상황은 ”유혹에 빠져서 진리를 떠난 사람이 있을 때“입니다.
19절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여러분 가운데 유혹을 받아 진리에서 떠난 사람을
누가 돌아서게 하면 여러분은 아십시오, 죄인을 유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한 사람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고 많은 죄를 덮을 것입니다.“(약 05-19-20)
누군가 유혹에 빠져 진리가 떠난 이가 있을 때, 그를 돌아서게 하는 것은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이때가 가장 ”기도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질병]은 육체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진리를 떠나 있을 때는 돌아오는데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는 거죠.
하나님은 이러한 ”[중보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상황 속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인내]는 어떤 체념이나 연약함 가운데 처해 있는 것이 아닌,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참여 노력입니다.
[농부의 인내]가 그랬고, 또 [욥의 인내]가 그랬습니다.
결과를 기대하는 인내뿐 만이 아니라,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인내하였던 [
욥의 인내] 가운데, 가장 능동적인 참여는 [기도]입니다.
고난 가운데 [참된 인내]는 ”참된 기도로 이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내린 결론입니다.
그 어려운 시대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또한 인내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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