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 우리의 소망 (벧전1:3~9) 말씀: 이재훈 목사님
요즘에, 전염병과 기근, 그리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절망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영어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는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인, 미국의 새들백 교회의 [워랜] 목사님입니다.
이 목사님의 아들이 오랫동안 우울증과 정신병에 시달리다가 27세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런 비극을 겪은 1년 후에,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 엄청난 고통을 어떻게 이겼느냐?“는 질문에,
목사님은 ”그때마다 저는 부활절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부활은 ”사흘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금요일은 ”죽음으로, 고통의 날“이었고, 토요일은 의심과 혼란의 ”비통의 날“이었으나,
하지만 일요일인 [부활 주일]은 소망과 기쁨이 있는 ”승리의 날“이었습니다.
여러분 또한 평생 동안 이런 날들을 수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가졌던 세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될 것입니다.
①첫 질문은 ”[고통의 날]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고,
②두 번째 질문은 “의심과 혼란스런 [비통의 날]은 어떻게 견뎌 냅니까?”라는 질문이고,
③세 번째 질문은 “기쁨과 환호를 맛보는 [승리의 날]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입니다.
이에 대한 [대답]도 “그것은 부활절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세상에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소망]이 생겼고,
[베드로]는 그 소망을 가리켜, ”살아 있는 소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베드로는 소망에 대하여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도망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처음에 그는 절망했고, 두려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 그에게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풍성하신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로부터 살리시어,
산 소망을 얻게 하심으로“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는데, 그것은 베드로만의 고백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장 먼저 ”부활이 가져다 준 소망“을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소망이라“고 표현한 것은 막연한 기대를 의미하지 않고, 과거의 분명한 사실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현재로 가져오는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을 믿고, “미래에 온전히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살아 있는 소망의 증거를 발견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살아있는 세 가지 증거”는 무엇입니까?
(1)첫째로/ 살아있는 증거는, “하늘에 썩지 않은 유업이 약속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겁니다.
4절에서 5절의 말씀에, “여러분을 위해 하늘에 쌓아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얻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 나타내려고,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고 있습니다.”(벧전1:4-5)
여기에, “[영원히 누릴 유업]이 하늘에 준비되어 있다.”고 했고, 심지어 “하늘에 쌓여져 있다.”는 표현까지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쌓여지면 녹이 슬고, 더러워지고, 쇄퇴해 지지만,
그러나 [하늘에 쌓여진 것]은 결코 썩지 않고, [영원한 유업]으로,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다 정복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미리 분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우리의 땅]이 아닌데, [우리 것]으로 약속하시고, ”미리 분배하셨다“는 것은
[그 유업]을 미리 분배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약속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승리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확신하게 해줍니다.
이 땅에 유업이 없을 때, 우리는 ”무가치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 ”예비하신 영원한 유업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므로, 우리는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터키지역에 가면, [카파도키아]라는 세계유산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많은 동굴과 지하 도시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에 사용했던 ”지하 무덤“으로, 사람들이 그곳에 숨어서 살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에서 단 며칠을 산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지하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 오랫동안 살면서도,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에 쌓여 있는 ”예비 된 유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가 지금,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땅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었고, 동굴에서 생활하는 ”버림받은 인생”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그들에게 “하늘에 있는 유업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뿐만이 아니라, [바울]도 “[유업의 풍성함]을 알게 되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 19절의 말씀에, “그가 여러분의 [마음눈]을 밝게 하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유업의 영광]이 풍성함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힘의 능력]이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어떠한지,
여러분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시기를 기도합니다.”(엡1:18-19)
이 말씀은 “[바울]이 기도했던 기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나라의 [유업의 풍성함]을 알게 되기를“ 기원했던 것입니다.
(2)둘째로/ 살아있는 성도들에게 있는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얻을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6절과 7절 말씀에,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온갖 시험을 당해 잠시 근심하게 됐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당하는 믿음의 시련이 불로 단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벧전1:6-7)
▶수많은 시험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소망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문]을 여는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여는 사건”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때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에,
그 소망으로 감당한 그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을 바라봅니다.
(3)셋째로 살아있는 소망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을지라도, 도리어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8절 9절의 말씀에,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벧전1:8-09)
[베드로]는 지금도 놀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너희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고, 감탄하고 있다.“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과 삼년을 함께 동행을 했고,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가운데에서 [지하 동굴]에 숨어 있으나, 예수님을 한 번도 눈으로 보지 못했고,
심지어 ”부활하신 육신”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자신보다도 더 사랑하고, 기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베드로는 감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이죠.
그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지는 못했어도, “[성령의 임재]가 임했기 때문“이죠.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그들 가운데 임했기에, [육신의 눈]이 아니고,
”[영혼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광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도 고등학교 이학년 때, 일이 생각납니다.
학교 기도실에서 점심도 먹지 않고, 기도를 해 봤어요.
왜냐하면, 예배 때마다 목사님이나 강사님들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봤습니까”라고 자꾸 물어 보는데,
제 마음이 힘들어 졌어요.
실제로 저는 예수님을 만나 본 적이 없었어요. 제가 곰곰히 생각해 봐도,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래서 어느 날, 작심하고 기도실에 가서, 점심을 금식하며 매달렸습니다.
”예수님, 저도 예수님을 보게 해 주십시오. 이래 뵈도 제가 중고등부 회장인데,
예수님을 봐야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오래 동안 간절히 기도했는데, 역시 배만 고팠어요.
그러나 그때는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일 년 반이 지난 후에, 제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가 [영의 눈]으로 예수님의 임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 안에 임재 하는 이들에게 나타나고,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부활 주일]을 보내는 오늘 하루,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스스로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 속에 수많은 성도들에게 나타난 것처럼, 오늘 나에게도 ”살아있는 소망“으로 나타나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역사할 때, 우리는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 속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 시대에 나에게도 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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