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오는 지혜 (약3:13~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야고보서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신약의 지혜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읽다 보면, 구약의 [잠언]을 읽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권면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행함으로 믿음의 온전함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 [주제]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지혜]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은 [지혜]를 만나야, “온전한 행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혜 없는 믿음이 ”얼마나 해로운 믿음이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우리의 삶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혜 없는 믿음은 자기중심적인 믿음이고, 광신적인 믿음이고,
또한 해로운 믿음으로 변화될 위험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이 [지혜]에 대한 말씀을 이미 주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약1:5)
이 [지혜]는 시험 가운데서 인내하고, 이겨내는 그런 지혜를 의미하죠.
곧 믿음대로 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지혜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의 핵심은 [지혜]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로부터 주시는 이 지혜를 의지해야,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깨닫는 것“은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대로행하는 능력”은 바로 지혜의 영역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서 [열심당원]이라고 불리었던 사람들은 이 폭력 중심의 대응을 주장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보복과 혁명을 주창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폭동이 자주 일어났고, 그래서 예루살렘은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야고보]는 이 폭력적인 혁명이 아니고, 정반대로 “고난 가운데 인내하라.”고 권면합니다.
13절에서 야고보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선한 행실을 통해 지혜에서 나오는 온유함으로 자기 행위를 보이십시오.”(약3:13)
이 질문의 의도는 “지혜로운 사람이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어가 [단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지혜로운 사람들을 찾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지금 지혜로운 자가 지극히 없다.“는 지적이지요. 그러므로 ”너희 가운데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선한 행실과 온유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보이라.“는 말입니다.
14절에서 16절에 말씀 같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지독한 시기심과 야심이 있다면, 자랑하거나 진리를 대적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 지혜는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입니다.
시기심과 야심이 있는 곳에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약3:14-16)
이 세속적인 지혜의 징후의 중심에는 [시기심]와 [야심]이 있습니다.
이 [시기심]과 [야심]도 겉으로는 ”열심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심히 하니까, 폭력적인 방법을 주창했던 것처럼, 그 [열심] 이면에 숨어있는 [시기와 야심]을 분별하지 못하면,
도리어 갈등이 더 심화되고, 결국은 마귀가 기뻐하는 악한 행위가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기심]의 뿌리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그런 [예]를 세 가지 살펴보면,
①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도 ”시기심에서 살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때,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그 원인을 “시기심으로 포장하여”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②이스라엘 왕, [사울]도, 그 몰락 원인이 [시기심]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올 때,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는 소리를 듣고, 사울의 시기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여, 그가 몰락해 가게 됩니다.
③또한 예수님을 죽이려고 빌라도를 압박하고, 거짓으로 선동하고 불법으로 재판하였던 [유대 지도자]들의 동기도 결국은 [시기심]에서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 된 교회 안에도, 그런 [시기심]은 여전히 살아있었으니,
고린도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분열이었고, 그 분열의 원인은 [시기심]때문입니다.
고린도서 3장 3절에, ”여러분은 여전히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으니,
여러분이 육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며,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고전3:3)
고린도교회는 열심히 있는 교회였고, 성령의 은사도 나타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 뒤에는 [시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다툼과 분열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는 음악과 모차르트를 다루는 영화이지만,
실제로 중요한 주인공은 [모차르트]를 시기하는 [안토니오 샬리에리]라는 악장입니다.
[샬리에리]도 훌륭한 궁정의 악장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모짜르트]를 따라갈 수 없어서,
모차르트의 천재적 재능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시기심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모차르트를 무너뜨릴까?”를 몰두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결국 자살을 합니다.
이때 이 [샬리에리]를 위로하고, 또 도우려고 찾아갔던 [신부]가 그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평등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샬리에리]가 품고 있는 생각과 정반대였는데, 그는 “이런 [시기심]을 합리화하는 것은 평등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의 불만은 ”나는 이렇게 성실히 노력하고 애를 쓰는데,
저런 사람에게는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평등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샬리에리]의 마음속에 깔려 있었고, [시기심]이 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평등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합리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타오르고 있는 [시기심]이 ”바로 평등에 대한 왜곡된 잘못된 사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평등에 대한 왜곡된 사상으로”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타오르게 하고,
“자신이 더 열심히 잘해야 되겠다.”는 의지보다도, “다른 사람이 잘못되게 하려는 그러한 [시기심]으로”,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땅에 속한 지혜]의 중심이 바로 [시기심]과 [야심]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지혜]의 징후가 [선한 행실]과 [온유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두 가지를 대조하면서, 정확하게 분석합니다.
[땅에 속한 지혜]가 “시기심과 야심”이라면,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선한 행실과 온유함이라“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지혜]가 주는 특징이 “자랑과 거짓말”이라면, [하늘에서 주는 지혜]의 특징은 “성결과 화평”입니다.
다시 말해서 땅에 속한 지혜는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성령의 9가지 열매와 유사하고,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내용과도 유사합니다.
이것은 [퓨리티](순결)이고, [유니티](화평)와 함께 동반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나 [유니티]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혼합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오는 지혜를 따를 때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의]와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땅에 속한 지혜]는 그 중심에 “이기심과 야심”이 있어서, 자랑과 거짓말을 통해서 혼란을 만들어내지만, [하늘에서 오는 지혜]는 정반대로 그 중심에 [온유함]이 있어서, “의와 화평을 이루어 간다.”고 봅니다.
야고보서 3장 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의의 열매는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이 화평의 씨를 뿌려 거두는 것입니다.”(약3:18)
이 말씀은 “모든 것을 가지고 지혜와 명철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지혜를 얻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하여, 성령을 구하여 얻듯이, 이런 기회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시기심와 야심“이 있는 한,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정파 싸움이나 그런 세속적인 악한 모습을 보면,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교회 공동체도 예외는 아닙니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도 깨어지는 것은 그 이면에 시기와 야심에서 비롯된
세속적인 지혜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오는 지혜가 중심에 있을 때, 진정한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각자가 먼저 [성결함]을 우선으로 하기에, [화평]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당시의 핍박과 가난 속에서도 세상과 똑같이 다툼과 분열로 얼룩지지 않고,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온누리교회 성도들도 하늘에서 오는 지혜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온누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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