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차별하지 마십시오 (약2:1~13) 2022.02.28

다이나마이트2 2022. 2. 27. 19:45

차별하지 마십시오 (약2:1~13)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은 야고보서의 네 번째 시간으로,
지난주에 “경건한 삶”에 대한 말씀이고, 오늘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1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약 2:1) 
 
[믿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나, [신앙]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주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간단하게 말하면 되는데,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했어요.
 
▶왜, [영광]이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 그를 거부했고 십자가에서 죽였잖아요.
그러면서 그들은 “갈릴리 촌 동네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조롱을 했고, 
또 “배운 것 없는 목수의 아들이라”고 고향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또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니까, 예수님을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놀렸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볼 때, “죄인들이 옆에 있으니까, 죄인이라.”고 본 것입니다. 
2022년 오늘, 예수님이 만약에 허름한 옷을 입고, 이 예배당에 들어오신다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맞이했을까요? 아니면 그분을 몰라보고, 무시하며 거부했을까요?
 
이어지는 2절과 3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회당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더기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시오‘라고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판 아래 앉으시오’라고 말한다면.”(약2:2~3)
 
2절을 보면, [회당]이 등장을 합니다. 이 [회당]은 여러분 잘 아는 것처럼,
유대인들이 고국을 잃어버리고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할 때, 더 이상 성전이 없기 때문에,
함께 모여서 만든 “회합의 장소”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며 지내던 장소이고,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누구나 하나가 될 수 있는 “유대인들의 보금자리”였어요.
 
하지만 어느새 세월이 흘러, [회당]은 강자들의 놀이터가 되어 버렸고,
“가진 자들의 쇼케이스로 전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히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조직이 변한 것이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금반지에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면 친절하게 맞이하면서, 좋은 자리에 앉혀주고,
혹시 누더기 옷을 걸친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서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지금 더 큰 문제는 그냥 일반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 아니라,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모이는 “예배의 장소로서의 회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크리스천들에게 얘기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유대교 크리스천들의 교회가 “차별의 온상이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확실히 “교회 안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벤쿠버에 있을 때, 청년부 예배를 끝마치고 나면, 서로 라이드를 해줘야 하는데, (거기는 전부 차로 다녀야 하니까) 어떤 형제의 차에는 ”예쁜 자매들만 태워 주겠다.”고 줄을 서는 거예요.
 
그건, 분명히 차별이지요.
사람을 겉모양으로만 보고, 내면의 아름다움은 무시하는 거예요.
 
이것은 젊은 청년들에게는 “겉모습에 끌리는 법”이니까요.
우리들의 공동체에도 그런 현상이 있지 않나요?
 
만약에 이런 모습이 우리 공동체 안에도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회개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가 찬양을 할 때, 우리는 모두 주가 필요해서 찬양을 하고,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데, 
왜,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들은 사람의 내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어요.
그런 모습이 우리들의 교회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어지는 4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여러분이 스스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을 따라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 아닙니까?”(약 2:4)
 
여기에 [차별]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거룩하신 주님은 “우리를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라“고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나서서 사람들을 차별하다니,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에 있을 수 없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놀라워!”라고 찬양하며, 그 은혜를 고백하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신앙 공동체가 세상 조직처럼 기득권층이 생기는 거예요.
 
크리스천들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먼저 ①세상에서, 그리고 ②교회 안에서, 두 가지 영역으로 본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도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럽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자든, 비신자든,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이유 때문에 분별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세상 문화에 결벽증처럼 차단하고 분리시키려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그런 분리를 통해서, 내가 거룩해진다.“고 잘못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분리주의]가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밖에 있든지, 세상 안에 있든지,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마치 팬데믹으로 전염병 바이러스가 온 세상에 퍼져 있는데, ”나 홀로 무균실에 있다.“면,
그게 건강해지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건강이라고 얘기하지 않아요.
 
내 몸 안에 면역력이 있어서, 어떤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내적 치유력]이 생기는 것이 진짜 건강해지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과도 나를 분리하고, 교회 안에서도 계층을 만들어서, 나랑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과 분리하고,
그렇게 해서 내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 척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강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허약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2005년도에 나온 영화를 한편 소개합니다.
인생에 대해서 통찰하기 좋은 영화로, [에비 에이터]의 주인공, ”하워드 휴즈“라는 사람은
미국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항공사를 운영했던 억만장자였는데, 그가 어린 시절에 전염병이 지금의 팬데믹처럼,
전염병이 많이 돌아서, 그때 이후로 평생 [강박증]에 시달리며 살았어요.
 
그래서 그는 공용 화장실에서 공용 비누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만의 비누를 따로 갖고 다니고,
항상 티슈가 있어야만 문을 잡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노년의 여러 가지 인생의 압박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지쳐가다가 결국에는 혼자 호텔에 칩거하면서 옷도 입지 않고, 뭔가가 접촉되는 것에 대한 불안증이 있어서,
결국에는 영양실조로 죽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과 분리 되었다”고 우리를 거룩하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더러움의 한복판으로,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구원 받은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조심해야 될 것 중에 하나가 [분리주의]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분리를 통해서, ”나는 거룩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대면도 안 했고, 상종도 안 했고, 같이 식사도 안 했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구원의 은혜와 신앙생활의 축복을 여러분은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은혜의 전달자]로 살아야 하고,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다가와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셔야 되고, 공동체 안에서 연약한 성도들에게는 다가와서
내가 먼저 받은 은혜와 축복을 기꺼이 나눠야 주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5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택해 믿음의 부유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약2:5) 
 
이 말씀은 세상에서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나,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거두어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해 주실 것이니, 여러분은 그렇게 영적인 부자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크리스천이 되어, 교회 생활에서 안정감을 느끼시나요?
그렇게 안정감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내적인 부요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수록 ”우리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신앙생활을 할수록, 말씀을 읽을수록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의 모든 영적 자산은 세상의 자산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물질적 자산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런 나의 영적 자산은 모두 위로부터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영적인 부유함]입니다.
 
이것을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1장 17절의 말씀에서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약1:17)
 
위에서부터 오는 것이 [영적인 부유함]이고, [안정감]입니다.
이어지는 6절과 7절 같이 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멸시했습니다. 부자들은 여러분을 학대하며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까?
그들은 여러분이 받은 아름다운 이름을 모독하지 않습니까?”(약2:6~7) 
 
▶여기서 “아름다운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귀족층이었던 사두개인들이 특별히 거의 대부분 하층민이었던 유대계 크리스천들을 굉장히 압박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그들을 박해하고 그들이 크리스천이 된 것에 대해서 모독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회에서 그렇게 당했으면서도 여전히 예배당에 있어도 크리스천들이 가진 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2)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번째 부분으로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가?“입니다.
 
8절 말씀에는 ”여러분이 성경대로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상의 법을 지킨다면 잘하는 것입니다.“(약2:8)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이 두 가지로 답변을 하셨는데, 그것은 ①[하나님 사랑]과 ②[이웃사랑]입니다. 
 
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40절의 말씀에도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27~40)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되,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사랑한다면, 차별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나 [타인]을 똑같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차별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사랑하실까요?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시면서, 나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와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인종과 성별에 상관없이, 사랑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얘기하자면 
①첫 번째는,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 났기 때문이고,
②두 번째로,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복음]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같이  읽어볼까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당시에 로마 사회에도 유대사회도 사회적인 차별과 계층의 구분이 너무나 심했기 때문에,
이 메시지는 정말로 충격적인 메시지였어요.
 
로마서 3장 22절 말씀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이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아니면 사람의 인종 국가에 따라서 인종 차별을 할 수가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고관과 평민 사이에서, 차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두가 하나라“고 다 품어주셨기 때문에, 내가 나서서 예수님은 다 끌어안고 계시는데,
”내가 줄 세우기를 한다.“는 것은 ”복음을 배반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결코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여러분 차별하지 마십시오.“라고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주관적 관점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차별을 안 할 수 있는 길은 주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내가 내 이웃을 사랑하면 해결되게 돼 있어요.
 
▶우리가 정말로 ”진정한 사랑을 합니까?“ 
이 물음에 대답은 ”사랑은 [등가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혼식장에서 자주 하는 말인데, “신랑이 너무 아깝다.”고 하거나, 신부가 너무 아깝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뭐 신랑이나 신부가 어떤 사람이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갖고 있든지, 학력과 경력이 뭐가 됐든지 간에, 아무 상관이 없어요.
 
▶신랑과 신부, 이 두 사람이, 결혼식장에 같이 선 이유가 뭐냐고요? 
그것은 ”똑같은 가치의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소중한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에 같이 서 있는 거예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놀라운 ”사랑의 등가의 법칙”인 거예요.
 
어떻게 창조주께서 이 망가진 죄인을 당신과 똑같은 값어치로 여겨주실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시고, 내 생명을 건지신 것이잖아요. 
 
[사랑]은 놀라운 [파워]를 갖고 있는데, 도저히 같은 [밸류]가 될 수 없는 것을 ”등가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100% 순도인 [진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 사람은 건강한 자존감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2- 13절을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의 율법]으로 심판받을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십시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약2:12-13) 
 
여기서 “자유의 율법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1장 25절에 나왔던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의 줄임 말이죠.
 
그것은 [복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를 세워갈 때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 [자유함] 때문에, 우리를 방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 은혜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