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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경건 (약1:19~27) 말씀: 이재훈 목사님
야고보서에서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은 성도들“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통해
”성령님을 체험한 성도들”이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쓰여 진 서신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 성령님을 체험하는 신앙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고,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공감대 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경건]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라는 단어는 [종교]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앙]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헬라어 원어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함의 의미”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 27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환란 가운데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물들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약1:2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나타나지만, 오로지 실천만을 강조하기에
”인간의 행위 중심의 서신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1장 19-27절의 말씀을 깊게 살펴보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오해입니다.
결국에,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경건]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야고보서]는
“우리의 전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올바로 반응함으로써,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합해서 이 [말씀]을 도표로 간략하게 요약을 하면,
[참된 경건]이란 ”말씀이 우리의 전 인격을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①말씀이 있고,---> ② 전 인격을 통해 ---> ③자신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 먼저 본문에서 [말씀]이라고 할 때, ▶그 말씀은 어떤 말씀을 의미하는가?
이미 18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도구“로 사용했으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지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통한 새 창조에 있어도 ”말씀으로 역사하신다.“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서도,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니,
곧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약1:23)
그러니까 ”우리가 거듭난 것이 말씀으로 된 것이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은혜에는 두 가지 통로가 있는데,
①그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진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한 이 [보혈]이 있어야 하고, 동시에 우리가 그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시며,
그 말씀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9절 이하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이 주어질 때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②또 이 말씀에 대한 표현이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은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는 것입니다.
1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이 말씀은 능히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약 1:21)
이 말씀이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말씀]은 모든 사람이 안에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숨겨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마음에 숨겨졌다.“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새 언약의 성취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 후반부에 보시면, 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 율법을 그들의 생각 속에 주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렘 31:33)
에스겔 36장 27절에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나옵니다.
같이 읽습니다. ”그리고 내가 내 성령을 너희 안에 주어서, 너희로 하여금 내 법령을 따르며,
내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만들 것이다.“(겔 36:27)
이것은 ”새 언약의 말씀“입니다.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돌판에 새겨주시고, ”인간이 그것을 보고 듣고 읽고 새김으로써, 행하라.“고 요구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시므로,
”그 말씀을 마음에 심어주시는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예레미아 선지자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시대일까요? 그 때는 평탄한 시대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닥을 치는 시대였고, 포로로 잡혀갈 만큼 심판을 당한 시대였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이 드러난 시대였기에,
인간의 죄악이 만연하므로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시대였으니까
“완전히 절망한 시대”에 “[새 언약]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에 말씀을 심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예루살렘에서 임했던 오순절의 성령 체험으로 자신들 안에 일어난 변화를 그들 가운데
이미 공감하고 있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마음에 심겨진 말씀”입니다.
이런 표현은 “새 언약의 예언”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를 비롯하여, 이 말씀을 읽는 성도들 가운데, 이미 우리가 새 언약에 성취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숨겨져 있지 않느냐?“를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말씀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고,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또 그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21절 후반부에 보면, ”그 말씀은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시고, 성령으로 그 자녀들에게 말씀을 심어놓으셨고,
그 자녀들로부터 절대 분리되지 않도록 숨겨 놓으신 거예요.
▶왜 숨겨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온전한 구원에 이를 때까지, ”그 말씀이 역사하도록” 아예 장착을 시켜놓으신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말씀이 생명력을 가졌으므로, 우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거예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거듭난 우리의 영혼 속에 말씀을 심어놓으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무엇을 이루어 가십니까?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이 그렇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말씀을 내재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에 심겨두심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감정의 상태로, 우리의 지적인 수준으로,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무엇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고, 온전히 구원받을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말씀이 마음에 숨겨졌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그 말씀이 우리를 이끌어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날 것입니다.
(3) 또 이 말씀은 어떤 말씀입니까?
1장 25절에 보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것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과거 옛 언약의 모세 시대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원래 율법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기 때문에 그걸 사용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마음에 새겨진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 시대의 율법이 아니라,
”새 언약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이라.”고 다 알고 있기에, 율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뿐입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이 자유를 누리셨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언제나 그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었고, 또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해서도 증명이 되었습니다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마음에 생겨진 말씀”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말씀]은 “우리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숨겨진 그 말씀”이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가도록 하고,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실 때, 가장 근간이 되는 비유로, “씨앗과 땅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지는 단계로, 이미 세 단계를 말씀하셨습니다.
①첫 번째 단계는 말씀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뿌려 지고, 마음에 심어 주는 시기이고,
②두 번째 단계는 그 말씀이 마음에 숨겨 진 상태로, 말씀의 씨가 널리 퍼지는 단계이고,
③세 번째 단계는 그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고, 거두어 추수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고, 지구상에서 말씀의 씨앗들이 드러나고 있는데,
지금은 추수를 기다리는 때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이 씨가 뿌려졌을 때, 땅의 상태에 따라 [길가]가 있고, [돌밭]이 있고, [가시덤불]이 있고,
좋은 땅이 있듯이, 수십 배의 열매를 맺으려면, 옥토에 심어야 합니다.
두 번째 반응으로 우리의 전인격적인 반응에 여러 신체 기관을 통해 나타납니다.
첫째로, [귀]의 반응을 알아보면, 19절에, “사람마다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천천히 하며,
노하기도 천천히 하라.”(약 01:19)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듣기는 빨리 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 말할 때 귀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입]이라는 기관을 통해 천천히 말하라.”고 경고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영혼이 제일 먼저 바뀌는 것이 뭡니까?
그것은 [언어]입니다. [말]이 먼저 바뀝니다.
인간관계 속에서의 제일 중요한 것이 [언어]입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입니다.
말씀의 생명력이 자라기 시작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영혼은 자신의 언어가 먼저 바뀝니다.
“말하기를 더디하고, 천천히 하라.”는 것은 “말의 단어 수를 줄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단어 짧게 말해서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좀 길게 표현하는 분들이 있어요.
이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그렇죠. 남자는 단어를 가급적 줄이고, 여성들은 가급적 말을 많이 해요.
남자들은 5분 이내로 끝내지만, 여성들은 두세 시간 한참 통화를 하고, 더 깊은 얘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오래 표현하는 여성의 언어 속에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요.
반대로 남성들은 상대방의 아픔과 공감능력이 떨어져요. 그러니까 단어가 많이 나오지 않아요.
여성들은 말을 하면서 “어떡하냐? 어떡하냐?”고 공감을 표시해 줍니다.
그럼 저쪽에서도 “그래, 그래서 어떡하냐? 어찌해야 하냐?”하면서, 한 말을 또 다시 반복하고, 서로가 웃지
22절에서 24절에서,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듣기만 해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만일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자기의 생긴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거울을 보고 돌아서서는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금방 잊어버립니다.”(약 01-22-24)
여기서 [말씀]을 “영혼의 거울”로 비유하였고, 그 거울 앞에서 우리의 겉모습을 보고,
우리의 겉모습의 더러움과 흐트러짐을 고치는데, 그 거울을 보고 나서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거예요.
“자기의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은 말씀을 우리의 영혼의 눈으로 보고 깨달았지만,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잊어버리는 모습과 같다.”고 그렇게 지적하시는 거죠.
▶결국 [귀]와 [입] 그리고 [눈], 이런 모든 기관의 기능이 어디로 집중이 됩니까?
그것은 [마음]이라는 기관으로 집중이 됩니다.
이 [마음]이 바로 “말씀이 역사하는 중요한 기관이 되는 것입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는 모든 반응이 어디로 결집이 됩니까?
결국에는 [마음]이라는 곳으로 집중됩니다.
▶우리의 영혼에 이 [마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을 때, ”딱 어디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민족마다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우리는 심장이 있는 가슴 쪽을 말하는데,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는 ”마음이 목구멍에 있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믿는 거예요.
또 어떤 나라는 ”마음이 창자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머리에 있다.“고 하지만,
그 위치가 중요한 게 아니죠. 중요한 것은 ”우리 인격의 중심이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들이 [뇌]를 통해서 들어오건, 우리 피부를 통해 들어오건,
모두 다 이 마음으로 다 결집이 되는데, 결국 ”이 [마음]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핵심이 되지요.
21절을 읽으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벗어버리고,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십시오. 이 말씀은 능히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약 01:21)
예수님이 말씀하신 [밭의 비유]에서 길가와 돌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그런 마음,
더러운 것과 넘치는 것을 ”밭을 기경해야 된다.“는 것인데, 결국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님의 임재만이, 이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끊어낼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것이 없다면, 이러한 것이 마음에 가득하다면, 말씀이 수납되지가 않는 거죠.
사람들은 듣고 보고 내가 느끼는 대로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넘치는 악과 더러움이 가득하면, 그런 마음이 눈을 잘못 보게 하고, 귀를 잘못 뜨게 하고,
입을 잘못 말하게 하는 선택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하는 거죠.
뉴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서 각자가 같은 사건을 보고, 서로 다른 얘기를 합니다.
미국에는 신호등을 보면, 우리는 빨간 불과 파란 불로 구별 되어 있지만, 미국은 글씨로 써 있어요.
그것은 워크(걸어라)와 돈 워크(걷지 말라)인데, 어떤 사람이 ”돈 워크“ 그랬더니 ”뛰어갔다“는 말이 있어요.
그것은 ”걷지 말라“고 해서, ”나는 뛰었다.“고 해석을 하는 거죠.
그게, 요즘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에요.
이런 [마음의 문제]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우리의 마음에 숨겨진 말씀이 있는데, ”마음에 심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이 [온유함]이 사람에 대해서는 ”온화하게 대하는 태도“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온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그 권위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뛰어났다.“는 표현은 ”모세가 화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에요.
모세를 자세히 살펴보면, 화를 얼마나 자주 내는 모습이 보입니다. 돌 판을 그냥 부숴버리고,
지팡이로 바위를 내려치기도 했어요.
그런 불같은 혈기를 보면, ”모세의 온유함이 뛰어나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죠.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에 대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는 온유함이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온유함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의 ”전 인격을 통하여,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의 자녀로서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좋은 선물과 은사를 주시듯, 우리도 환란 가운데 연약한 이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은 우리 마음에 숨겨진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도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의 역사“ 만이 가능합니다.
아버지는 이를 이룰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마음의 말씀을 숨겨주시고,
그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하며, 온전케 함으로 아버지를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전 인격이 말씀 앞에 올바로 바로 서고, 온유함으로 받아 열매 맺는 자녀다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닮은 자녀가 되어야 하고, 우리가 환란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야 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신을 거룩하게 지켜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실천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말씀을 나누며 살 때, 욕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참된 경건]은 ”나누며 돌보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우리도 복음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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