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 (약1:13-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북극에서 에스키모인들이 “늑대를 잡는 방법”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은 날카로운 칼에 피를 흠뻑 묻혀서, 칼날을 위쪽으로 향하게 세워서, 땅에 꽂아서 늑대를 유혹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와서, 칼날을 핥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늑대의 혓바닥이 날카로운 칼끝에 찔려서, 자기도 모르게 늑대는 자신의 피를 흘리게 되는데,
그 피에 더 끌리어 빠른 속도로 계속해서 칼날을 핥게 되어, ”나중에는 죽게 된다,”고 합니다.
또 “소를 편안하게 죽이는 방법”으로, 어떤 장치를 만들어서 그 과정을 지나가면, “결국에는 소가 죽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낯선 환경에 처하면 소들이 불안해서 요동치기 때문에, 소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가장 평안한 환경으로 만들어 지나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들이 자나가는 통로에 ”어미 소의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을 만들어서,
그 부드러움에 젖어드는 과정을 통과하면, 도살이 완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동화에 나오는 ”삶은 개구리“에 대한 우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냄비 속에 개구리를 넣고, 물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게 되면,
개구리가 자기도 모르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물 온도를 높이면, 개구리가 뛰쳐나가지만, 물의 온도를 서서히 올리게 되면,
개구리는 “거기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서서히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유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어 간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죽음에 이르는 유혹“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돌발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점진적이고, 또한 서서히 다가오기에,
자신도 모르게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속지 마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이것은 유혹의 과정 속에는 반드시 우리가 속게 되는 과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늑대가 그 피 냄새에 속았고, 소도 어미 품으로 착각해서 속았고,
개구리도 따스함에 속은 것과 같이, 우리도 이런 유혹에 넘어가기 쉬우니, ”속지 말라.“고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내게 닥친 유혹이 ”끔찍한 범죄“라고 방심할 때, 그 유혹이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의 예를 보면, 대부분 믿음이 있는 거장들도 넘어집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입니다. [다윗]이 유혹에 넘어진 것은 큰 사건이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에서 조금씩 조금씩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유혹에 쓰러진 때는 골리앗을 쓰러뜨린 직후가 아니고,
왕궁을 거닐다가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무너져간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내 자신의 삶을 지켜왔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있는 작은 [씨앗]으로 부터
”나를 유혹에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렇게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지었을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습니다.
그 대상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사단]일 수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추궁하셨을 때, ”아담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창세기 3장 12절에, ”하나님께서 함께하라고 제게 주신 그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어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아담]이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그 여자에게 책임을 물었을 때는 ”뭐라고 여자는 대답했습니까?“
13절 후반부에, ”뱀이 저를 꿰어서, 제가 먹었습니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여인]은 또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혹에 넘어가 타락한 영혼에게는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럼 오늘 1장 13절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시험을 당할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고 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약 01:13)
”12절까지의 시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세우기 위한 [테스트]로서의 시험이지만,
”13절에 나오는 시험“은 [유혹]으로, ”Temptation으로서의 시험“입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그 배경에는 [사단]이 있고, 또 사단의 종이 된 이들을 먼저 쓰러진 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는 ”유혹으로서의 시험“이고, 이 유혹에 넘어갔을 때 인간들은 반드시 책임을 전가하게 됩니다.
그럴 때, ①다른 사람을 탓하거나, ②혹은 환경을 탓하기도 하고, ③우연을 가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왜, 하필 거기에 있었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은 ”유혹의 원천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고, 그 욕심을 부추기는 사단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14-15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각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해, 죄를 낳고, 죄가 자라서 사망을 낳습니다.”(약 01-14-15)
여기서 “각 사람”이라 함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또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데, “방해되는 갈망”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죄와 유혹의 [라이프 사이클]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세 단계로 나누어서 등장하는데, (1)첫 번째 단계는 “미혹의 단계“입니다.
이 ”미혹이라는 단계”는 낚시 바늘에 미끼를 매달아서 물고기를 낚시할 때, 그 물고기가 그 미끼를 무는 상태를 말하고, 물고기가 미끼를 물었을 때는 낚시꾼에 의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그 미끼를 물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물고기가 미끼를 봤지만,
아직 물지 않은 상태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게 미끼를 보고, 물고 싶은 욕구가 생긴 것, 그 자체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물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미혹의 단계]가 시작됩니다.
(2)그런데 그 [미혹의 단계]는 곧바로 [잉태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잉태의 단계]는 그 욕심이 유혹을 만나 결합하여, “죄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잉태한 [죄]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고, 그 죄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3)세 번째의 단계인 [성장의 단계]를 자나서,
(4)결국에는 마지막으로 [사망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죄]는 이와 같이 ①[미혹]의 단계 —-> ②[잉태]의 단계 —-> ③[성장]의 단계를 거쳐서 –--> ④[사망]의 단계로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유혹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올바른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있는 종교는 “욕심을 없애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욕망과 갈망을 없애야 된다.”는 것은 인간의 욕심이 근원이기 때문에, 그 욕심을 제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이 ”갈망의 원인“이지만, 그걸 없애려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수행]이지요.
[갈망]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존재하도록 만드셨을 때, 배고픔을 느끼는 식욕과 성욕과 문화욕등 모든 영역에서 땅을 정복하고, 충만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그 통치의 욕심,
그 자체 이면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통치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생겨난 거예요.
그러므로 그 [욕구]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욕구의 방향이 잘못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구를 올바른 방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올바른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올바른 정체성]으로, 유혹의 첫 번째 단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도미노 현상]처럼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올바른 정체성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누구나 미혹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가?“를 인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가져야 유혹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지난주 말씀에서 ”가난한 자는 자신의 높은 위치를 자랑하고, 부자는 자신의 낮은 위치를 자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자신의 현 상황을 기준으로 정체성을 삼으려고 할 때, 유혹에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최초의 타락에서 ”왜 여자가 뱀에 미혹되었을까요?“
그것은 뱀이 여자를 속인 겁니다. 여자는 사람이며, 사람은 통치자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의 통치자이기에, 뱀을 다스려야 하는데, 거꾸로 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은 잘못입니다.
마치 뱀이 인간을 심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속인 거죠.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함으로, 미혹의 단계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인물 중에서 [에서]와 [야곱]이 있는데, [에서]는 사냥을 좋아했고, [야곱]은 집안에 머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태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가져올 때마다 [에서]를 축복하고, 좋아했어요. 그래서 [에서]는 그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기를 원해서, 끊임없이 들에 나가, 사냥을 했습니다.
실제로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사랑한 것 같지만, 실상은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사랑한 것이죠. 그래서 아버지의 정체성이 무너졌으니, 그 아들의 정체성도 무너진 것이죠.
그렇게 정체성이 무너졌을 때, [에서]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드디어 장자권을 넘기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은 복음 안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바로 설 수 있는 죄인임을 깨닫고, 십자가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악을 시험하시지도 않고, 악의 시험 받지도 않으시는 분이고, 도리어 하나님은 좋은 선물을 주시는 아버지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7절의 말씀에서, ”온갖 좋은 선물과 온전한 은사는 위로부터 오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옵니다. 그분에게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약 01:17)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 유혹은
①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했고,
②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보호하도록 하라.“고 유혹했으며,
③그리고 사단에게 절하면, ”천하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유혹을 받았어요.
이런 세 가지의 공통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버리라.”는 것이죠.
①아버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고,
②성전 꼭대기에서 내림으로 “아버지의 보호하심은 의지하지 말라.”는 유혹이고,
③사단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도“ 스스로 경배를 받을 수 있다.“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의 본질]은 ”아버지로부터 관계를 끊는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능력이 있으셨지만, 그러나 그런 능력을 행사하시는 순간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의 본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우리에게 유혹이 그토록 끈질기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혹이란 사단의 궁극적인 대상이 우리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사단의 궁극적인 대상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유혹이 사라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강하게 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성령 안에 거하며, 아버지의 자녀로 살아갈 때,
사단의 목적은 우리를 아버지로부터 끊어내고 아버지의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점점 닮아가고,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는 것을 사단은 견딜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조금도 [어둠]이 없으시고,
어둠이 없으시기에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빛이죠.
여기서 [완전한 빛]이란 ”그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유혹에 넘어지는 것은 ”숨겨질 수 없는데,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니,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중에서 ”주신 선물 중 가장 좋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18절의 말씀에 그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으셨기“ 때문입니다.
같이 함께 있겠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창조하신 것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그분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약 01:18)
하나님은 유혹에 빠지는 이들과 대조되는 일을 하십니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의해 미혹되어 죄와 사망을 낳지만,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그분의 뜻을 따라 새 생명을 낳으십니다.
사람들은 유혹에 빠져 죄와 사망을 낳고, 아버지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복음으로 우리를 낳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재창조하신다.”는 거예요.
여기서 “재창조”라는 말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 죄와 사망을 낳는 흐름에 휩쓸어 살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 것인가? 를 구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신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 우리 안에는 아버지와의 교제를 갈망하는
그런 속성이 생겨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하면, 아기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자신을 보호하고 돌보는 이에 대한 그런 호칭이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돌보심을 갈망하는 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사라진 것은 ”유혹 가운데에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반대로 ”기도 가운데 있다.“는 것은 ”유혹을 물리치며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아버지께서 온갖 좋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오직 아버지께 주시는 좋은 선물들로만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울 때,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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