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위에서 만난 친구 (눅19:1-10) 말씀: 이재훈 목사님
현대 사회의 가장 무서운 병이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2018년 1월에, 영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영국의 메이총리가 국민들의 외로움을 담당할 장관을 시민사회 장관을
“외로움 담당 장관(미니스터 로니리스)”라는 명칭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그것은 영국 인구의 6천 500만 명 중, ”그 중에 900만 명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영국 적십자사의 설문에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360만 명의 노인이 TV(텔레비전)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니,
이 외로움은 비록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외로움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삶을 나눌 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의문이 생깁니까? 그건 소속감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디에 소속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속감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속감”에 대한 답을 알면, 그 사람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가족]은 어떤 가족이겠습니까?
그것은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가족”입니다.
[진정한 배우자]는 “마음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친구 같은 배우자”를 원합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들이 언제든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같은 부모”일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고,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들을 귀하게 여기시고,“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실 겁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친구가 되어 주신 이야기“입니다.
원래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이라“는 의미이고,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입니다.
그 부모는 “순결한 인생을 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지었지만, 자신의 이름과 정반대의 인생을 살게 되어 직업은 [세리]였고, 세리장의 위치에 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당시에 [세리]가 하는 일은 ”로마 정부를 대신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받고, 또한 여행하는 상인들로부터도 막대한 세금을 거두고, 리베이트를 착복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리]를 “영혼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과의 교제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만나도 “아는 척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세리와 죄인들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세리에 대한 그 미움과 증오가 강했는가?”를 알 수가 있으니,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삭개오]는 외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비난을 받고, “따돌림을 받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비난일지라도 고통스러운 것이며, 더군다나 양심이 있다면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기다고 있습니다.
3절 4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보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잘 보기 위해, 먼저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로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눅 19-03-04)
우리는 이 장면을 상상할 때, 철이 없는 어린이나 청소년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행동은 철이 없는 청소년의 행동이 아니라, 나이가 든 중년의 “로마의 공직자 신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른답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사회적인 위치로 볼 때,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리고]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메인 도로에 뽕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몰래 올라간 것은 [세리]에게 퍼부어지는 비난과 조롱을 인식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조차도 잊어버리고,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런 [삭개오]의 모습이 곧 그의 영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는 위기에 처한 구도자의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진짜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외로움의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외로운 영혼의 위기”입니다.
그에게는 사회적인 위치가 있었지만, 외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평안한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양심의 가책 속에 살았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때로는 어떤 환상으로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타났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 같은 인생”으로 인하여, 늘 외롭고, 어떤 깊은 눌림 속에, 그는 묻혀 지냈었기에, 그런 위기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소문으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는 말을 듣게 되어, 더욱 예수님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시고, 뽕나무 위를 올려다보시며, “삭게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묵어야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영화 필름으로 만든다면, [클로즈 업]시키면서 [줌인]으로 확대하여, 포착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10년이나 20년의 오랜 세월을 걸쳐서, 어떤 훈련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단 한순간의 감동으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면, 우리의 인생은 변화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차세대 교사를 할 때가 생각납니다.
그 때에, 제가 토요일마다 신방을 했는데, 소년부 예배 때에 설교만 시작되면, 막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부모님을 만나서 알게 되었고, 그 아이의 이름도 알게 되었는데, 그 다음 날에 주일이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아이들이 떠들지 않고, 제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거예요.
떠들던 아이들이 조용하니까,오히려 제가 더 불안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그 아이들의 눈빛에서, ”이제 우리는 끝났다. 전도사님이 우리 부모님을 알고 있으니까, 내가 떠들었다간 바로 엄마에게 연락 갈 거야“라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삭개오는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름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즉시 내려오라. 내가 너희 집에 머물겠다.“고 제안하십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이 ”집에 머물겠다.“는 것은 단순히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을 체류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이 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1)첫째 기적은 [삭개오]가 나무에 숨어 있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의 생각으로는 ”내가 찾아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으로 착각하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무르시겠다.”는 것은 단지 필요한 숙소를 해결하시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너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프러포즈]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나 자기 집에 거주하도록 들이지 않습니다.
만일에, 집에 초청을 하였다면, 그것은 “평생을 나눌 친구로 인정해주겠다.“는 거예요.
이 장면에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7절에서 ”사람들은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근 거립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10절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고 이유를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신 이유는 “그가 잃어버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찾지 않아도 되는 무가치한 것이 있고, 반드시 찾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놀이공원에서 어린 자녀를 잃어버렸을 때,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심정으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왜 외롭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혼자 있으면 외롭게 느끼지만, 어떤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외롭지 않아요.
소속감이 없는 사람은 “원래 있어야 될 그 소속에서 벗어났을 때” 외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인생의 목적이었던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유]는 “회개한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는 이제 돈으로 성취감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버리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행복해도 외롭습니다.
이런 모습이 “[삭개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삭개오]를 책망하거나, 회개를 요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네가 네 죄를 알렸다.”고 나무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삭개오]는 자진해서, “주여, 보십시오, 제 소유물의 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누군가를 속여 얻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의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 있는 그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3)세 번째 의미는 “부정한 삶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에서 ”잃어버린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약에서 이 손해배상의 제사가 [속권제]인데, 그것은 원금 플러스 이십 퍼센트에요.
손실액에서 “플러스 이십 퍼센트이니까, 오분의 일만 더 추가하면, 배상액이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나 갚겠다.“고 자진해서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정한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관계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참된 회개의 증거”이지요.
▶[삭개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곳”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나무 위에서”그런 생각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가 나무에서 내려와서, 이런 고백을 했을 때는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 위하여 [삭개오]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잃어버린 영혼을 찾기에, [십자가]에 오르신 겁니다.
▶그가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그것은 [삭개오]와 같은 이들을 찾고, 구원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저주를 한 몸에 받으셨기에, 외로운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시대의 [삭개오]가 이 설교를 듣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남 몰래, 외로운 삶에서 친구를 갈망하고 있는 영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무 위에 숨어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혹시 이 예배당의 기둥 근처에서 숨어 계시는 분들이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러분을 찾으시고, 여러분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삭개오]처럼 예수님을 초청하시고,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나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친구]로 모시고, 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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