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보는 인생의 지혜 (전7:1~4) 말씀: 이재훈 목사님
오늘 말씀은 제가 예전에, [러브 소나타]에서 사용했던 [예화]를 다시 인용하려고 합니다.
어느 [부자]가 아들에게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7살 난 아들을 데리고, 가난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거대한 저택]을 나와서 아들을 데리고, 작은 시골 농장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어렵게 사는지?”를 보여주려는 의도입니다.
그곳에 있는 아주 작고 허름한 집에서 이틀 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들이 가난한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는지?“가 궁금해서,
아빠가 ”아들아, 너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너는 무엇을 느꼈느냐?’고 물으니까,
아들은 서슴없이 대답했어요. “아빠 정말 좋았어요.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뿐인데, 그 집에는 네 마리나 있었고, 그 집 뒤에는 개울이 있어, 너무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고, 우리 집에는 전등만 있는데, 그 집에는 멋진 별들이 있었어요. 우리는 밤에 제각각 혼자 있는데, 그들은 모두 둘러앉아서 친구처럼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았어요. 아빠, 정말로 감사해요.”라고 소감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순수한 세상을 “거꾸로 보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전도서]는 “모든 것이 헛되고, 덧없는 세상이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에게 [지혜]를 전해 주는 책”입니다.
특별히 [전도서 7장]은 대다수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저 옳다.”고 생각하는 상식을 “깨뜨리는 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이 무엇보다 더 낫다.”라는 [비교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인생을 거꾸로 볼 때, “깨달을 수 있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그 초반에 나오는 몇 구절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2절과 4절을 연이어서 읽으십시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모든 사람은 죽게 돼있으니 말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다.”(전 07-02-04)고 합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는 [잔칫집]에 가는 것이 훨씬 더 낫지요.
그러나 “참된 지혜로운 사람“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나음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은 [잔치의 즐거움]을 정죄하는 말이 아닙니다.
[잔치의 기쁨]도 물론 중요하지만, [초산집]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결혼 잔치]에 참여하셨고,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심으로 ”잔치의 기쁨“도 아시지만, 그것보다도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가 더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상집]에서만 얻는 세 가지 지혜는 무엇일까요?
(1)첫째로, [이름]에 대한 [평가]가 ”삶의 풍요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서, 개역 개정성경에는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고 했는데, 우리 말 번역에서는 [향수]라고 했는데, ”[기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맞는 번역입니다.
▶여기서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은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새로운 이름“을 받고, 그것이 가족들의 행복이지요. 그러나 그 이름을 일평생 사용하다가, 죽음 이후에도 존귀한 이름이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이름]은 죽은 후에도 오래토록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좋은 기름]이란 ”죽음과 관련이 있는“말입니다.
이것은 [시체]에 향기로운 기름을 부어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얻은 ”부유함의 상징“으로, ”최고급의 향유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런 풍요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존귀한 이름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초상집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보면,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분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고 말씀하시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전해져서, 기억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인]으로만 기억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이름]을 기억하시고, 그 여인의 이름을 존귀한 이름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여인이 알았던 [지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좋은 기름]보다 [좋은 이름]이 더 나은 것이라”는 지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머리에 [값비싼 향유]를 부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에 대한 평가“는 한두 번의 사건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긴 세월에 걸쳐서 내려지고,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을 추구하면, 절대로 좋은 이름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죽음 너머까지를 내다보면, [값비싼 향품]보다, 죽은 후에도 남을 [좋은 이름]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초상집]이 [잔칫집]보다 더 나은 이유입니다.
(2)둘째로, “인생의 [시작]보다, [마지막]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7장 1절 후반부에 보면,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낫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나는 출생이 떠나는 죽음보다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러나 인생을 [거꾸로 보는 지혜]는 “죽는 날이 태어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청교도]였던 [윌리암 로라]는 분은 “매일 누어 자는 [침대]를 ”자신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그 침대에 누워서, “주변의 사람들이 나의 삶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할까?“를 상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침대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침대라고 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 할까요?
”참으로, 이분은 정말로 친절한 분이었고, 이분은 인품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섬겼던 분“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이분은 정말로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다.“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장례식에 갈 때마다, ①빨리 끝내고,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분이 있고,
②그러나 그의 [관]을 바라다보며, ”언젠가 나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깊은 묵상에 잠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초상집]에서의 [지혜]“라는 것이죠.
그래서 [모세]는 ”인생의 날을 계수할 수 있는 것이 지혜“라고 말했습니다.
[시편 90편 12절]의 말씀에서,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가르치소서. 그래야 우리가 마음의 지혜를 담게 될 것입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죽음]이 [탄생]보다 더 낫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죽음을 멀리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려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경]은 “죽음에 초점을 두고, 예수님의 죽음에 모든 초점”을 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는 대개 살아있을 때의 기록들이지만, 오로지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그 죽은 이후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도 예수님의 죽음에 이르는 그 기간에 일들을 집중적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죽음으로 이루신 놀라운 [생명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건]이고, 그것이 ”죽음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낫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탄생]보다도 [죽음]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3)셋째로, “[웃음]보다 [슬픔]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3절의 말씀에서, “슬픔이 웃음보다 나은 것은 슬픔 어린 얼굴이 그의 마음을 바로잡기 때문이다.”(전 07:03)
세상에는 슬픔과 웃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누구나 [웃음]을 택하겠죠.
그러나 [거꾸로 보는 인생]의 지혜는 “웃음이 슬픔보다 더 낫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슬픔의 유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모든 웃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웃음]은 경솔한 웃음이거나 “경박한 웃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7장 6절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웃음은 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 또한 허무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웃음보다 슬픔이 낫다.”는 말이고, [슬픔의 의미]를 아는 사람만이 진정 웃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초상집]에서의 슬픔을 아는 사람“은 진짜 인생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초상집의 슬픔에 참여하게 되면, 오늘의 즐거움보다도, 내일에 초점을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이 ”구부러진 길“이 되었을 때, 그 굽은 길이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이라면, 일 때 때로 우리는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도서 7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이 내 인생에 [굽은 길]이 되었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펼 수 있겠는가?“라는 엄숙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부려 놓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펼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육체의 질병] 속에 있을 때, 내 인생에 왜 이렇게 구부러진 것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제1장로교회 목회자였던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이 [악성 암]의 진단을 받고, ”이제 3주밖에 살지 못한다,“라고 했을 때,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만일 당신의 운명에 굴곡을 놓으신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꾸시려 하겠는가? 만일에 하나님께서 구부리신 것을 바꾸려 한다면, 그것은 예전만큼 선하지 않을 것이고, 상황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나에게 주어진 구부러진 것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고백했어요.
우리 인생이 이렇게 심하게 구부러진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구부러짐을 통하여, 웃음보다 더 나은 지혜를 하나님은 주신다.“고 믿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구부르게 하신 것을 누가 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에서 가장 구부러진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부리신 사건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고 가장 통탄해 하는 슬픈 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악]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얼마나 구부러진 사건입니까? 그러나 그 [십자가]에 구부러짐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 [십자가의 슬픔]을 겪지 않고, 세상에 웃음으로 인생을 채우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웃음에 취해서 “가시나무 타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할 것입니다.
언젠가 다가오는 그 죽음이 “나의 현실”이 될 수 있고, 그리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서 7장]에 나타나는 “인생을 거꾸로 보는 지혜”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거꾸로 보면서 얻는 지혜”입니다.
인생을 거꾸로 볼 때, 나타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설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을 뒤집어 보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거꾸로 봄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우리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이 곧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따라 감으로,
“이 세상을 거꾸로 보는 지혜”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더 많이 가시기를 바랍니다.
잔치에 있는 사람들의 기쁨을 나누는 것보다,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인생을 새롭게 사는 지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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