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다시 새롭게 소명을 따라 (요21:15~17) 2022.01.16

다이나마이트2 2022. 1. 16. 17:01

다시 새롭게 소명을 따라 (요21:15~17)  말씀: 이재훈 목사님

미래를 새롭게 열지 못하는 원인은 “과거에 대한 상처와 기억” 때문입니다.
그 중에 “실패에 대한 기억”은 “잠재력을 가로막고,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과거의 상처와 그런 기억”을 치료하지 않고는 회복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묶여서 자유로워지지 못한다면, 새로운 미래를 살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실패에 대한 상처”가 있다면, 반드시 치유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치유하시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하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회복시키려고 노력을 합니다.
누구나 “과거의 실패와 기억”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다시 생각하면, 아주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없이는 “[회복]이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만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책임을 추궁하거나 복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켜 주려는 계획”입니다.
 
▶[베드로]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나설 때, “대제사장의 집에서 예수님을 세 번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에서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예언과 경고를 하셨음에도, [베드로]는 자만하여,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부인“을 했습니다.
 
[4복음서]에서 똑 같이,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도 매우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이렇게 실패한 [베드로]를 예수님은 버리지 않고, 그를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시 부르셔서, 그에게 [소명]을 주시며, 다시 새롭게 회복시키십니다.
 
이렇게 [베드로]를 회복시켜주시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들이 과거에 잘못한 일이나 상처도 싸매어 주고, 다시 소명을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베드로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3절에서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라고 말하자, 그때 다른 제자들이 ”우리도 같이 가겠소.“라고 같이 따라갑니다. 
 
이것은 단지 생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를 청산하고, 어부로 되돌아가겠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나타나신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베드로는 처음으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리고 두 번째로 나타나셨을 때는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기를 잡으러 감으로써, ”과거에 실패한 기억을 억누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기쁨과 감격도 있었겠지만, 또 한편으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기가 합당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있었기에, 그는 평범한 어부의 삶으로 되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오셔서 ”실패에 대한 상처“를 회복시키시고, 소명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려고 세 가지 세팅으로 노력하셨습니다. 
(1) 그 첫 번째 세팅은 [빈 그물]입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베드로]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인데, [베드로]는 무엇인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3년 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동일한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빈 그물]은 [베드로]가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었는가?”를 기억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어떤 때에 예수님을 만났는지?”를 한번 기억해 보면, 이해가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했을 때 보다, 실패했을 때에 예수님을 만난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전체에도 그렇습니다. 
어떤 일이 성취되었을 때보다, 절망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자신이 도망가는 길에, [베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그는 아주 냉소적인 사람이었고, 원래 동생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았지만,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의도적으로 접근하셔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시면서부터 예수님과의 만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던 때이고, “오늘은 틀렸다”고 생각하며, 그물을 정리하던 시간이라, 그 말씀을 받아드리기 어려웠고,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였던 베드로가 “나사렛의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라는 분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내가 속는 셈치고, ”한 번 해 보자.“는 심정으로 따랐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혀서, [베드로]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며,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언제 만났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났어요. 어쩌면 갈릴리 어부협회 회장도 역임했을 [베드로]가 가장 자존심이 상하고, 가장 실패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2) 두 번째 세팅으로, 그것은 [숯불]입니다.
 
장면이 바뀌어, 육지에 올라온 후에, 젖은 몸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숯불과 생선과 떡을 준비해 놓으셨고, 밤새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펴놓으시고, 지금 잡은 생선을 가지고, 요리사가 되어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숯불]이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18장에서 ”대제사장의 집들에서 베드로가 숯불을 쬐고 있었다.“는 장면에서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의 집들에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숯불 앞에서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그 때 바로 그 동일한 숯불이 자신 앞에 놓여 있었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처절한 실패가 떠올랐을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양심]이 얼마나 찔림을 받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무언의 설교를 하신 것이니까, “숯불 그 자체”가 힘 있는 무언의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숯불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배반한 제자들을 위해, 직접 요리를 만들어 아침 식사를 준비하시고, 함께 식사하자“는 모습에 제자들은 놀랬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아침 식사를 차려주셨으니, 제자들은 모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경악했던 것입니다.
 
저도 그와 같은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2002년도에 하용조 목사님을 모시고, 아프카니스탄을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제가 [비서]로 따라가서 목사님을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 아프카니스탄의 [카불]에는 함부로 들어 갈 수 없어서, [유엔기]를 빌려 타고 갔어요.
시내에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빌려서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하목사님이 아침 식사를 다 준비해 놓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비서]이고, 젊은 사람인데, 제가 먼저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다 차려져 있었어요. 어디서 [꽃]한 송이를 따오셔서 꽂아 놓고, 저를 기다렸어요.
 
이런 사연은 죄송한 마음이 들어, 야단을 맞을까 봐 장로님들에게 말씀도 드리지 못했어요.
[베드로]도 예수님이 마련해 주신 그 아침 식사에, 얼굴이 달아올랐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미 세 번씩이나 공개적으로 부인했는데, 그걸 예수님이 모르신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잘못했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잘못하면 관계를 배신하고, 또한 관계가 깨어지면, 마음이 달라지지만, 
[우리의 주님]은 우리가 잘못하더라도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3) 세 번째 세팅은 식사 후에, 예수님께서 [세 번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①첫 질문은 15절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야?“라고 부르지 않고, 옛날에 부르던 이름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페트라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이름은 ”반석“이라는 뜻이므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했을 때, ”바로 그 신앙 고백과 같은 인생이 되라”는 의미에서, [반석]의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베드로]가 배신하는 순간에 그의 이름은 과거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의 [시몬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모습이 아니고, [시몬]이라“고 부른 것은 “그 자체가 책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추궁을 하거나, 야단치지 아니하시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시는 것으로도 ”그 자체가 가장 위대한 책망“입니다.
 
②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보다“라고 비교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의 원인을 상기시켜주는 말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자신이 다른 제자들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자만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린다.“라고 했을 때도 나서서 ”모두가 다 버릴지라도, 나만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렇게 가장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죠.
문제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게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어떤 성도들보다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에, 그것은 [자만]이 되어, 잘못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언제나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많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만,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는 게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우월감과 착각이 있었으므로, 예수님이 그런 질문을 던지신 거예요.
 
거기에 [베드로]는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하니까,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아시고, 살피시는 분에게 판정을 맡겨 드리게 된 셈이지요.
 
이런 [베드로]의 대답은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며, 또한 진실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냥 ”걱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회계가 담긴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답]으로 베드로는 ”회복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3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3번]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3번이나 고백하게 하신 것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실패의 원인]만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베드로]를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③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부르셨을 때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추가로 “목양의 소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 만이 아니라, 이제는 “너는 내 양을 먹이는 소명도 더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너는 실패했으니, 사람을 낚는 어부가 아니라, 너는 그물만 만지며 살라.”고 하시지 않고, 양떼를 먹이고 치는 목양의 책임까지 더하는 소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고,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소명]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맡겨주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를 치유하시며, 다시 새롭게 우리가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우리의 상처가 아무리 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주님 앞에 다시 설 때는 “그 모든 것”은 다시 새롭게 회복 될 수 있습니다.
 
▶그 [회복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소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는 “우리의 실패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고, 손상시킨 바로 그 자리에,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 [소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새롭게 시작하는 2022년도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