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의무에서 기쁨으로 (from duty to delight) (빌1:12~18) 2022.01.02

다이나마이트2 2022. 1. 2. 19:12
의무에서 기쁨으로 (from duty to delight)  (빌1:12~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모든 인생에는 피할 수 없이 주어지는 [의무]가 있습니다.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고, 국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가 있습니다.
 
또 기업에서 고용 계약에 따른 의무도 있고, 믿는 사람들은 성도로서 의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서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의무]는 태도에 따라서, 세 종류의 사람들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①첫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무책임하게 살아가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인생입니다.
 
②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의무를 “어쩔 수 없이 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의무를 억지로 감당하기에, 그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고, 불평이 가득합니다.
 
③세 번째 부류는, 자신의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주어진 의무를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부모로서의 의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같이, 
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의무를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배가 [의무]가 아니라, [기쁨]으로 여기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무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기쁨]으로 받아드립니다.
 
부모 됨의 기쁨, 자녀 됨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기쁨으로 받으니까, 법의 질서를 지키고, 내야 하는 세금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오늘은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많은 [의무]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의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괴롭히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된 삶으로 인도하려고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 [의무]가 나에게 있다면, 우리는 [기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영어로 From Duty To Delight ([의무]가 [기쁨]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책임이 하나님 앞에 기뻐하는 삶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단지 긍정을 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마음]은 그렇게 쉽게 의무를 기쁨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만나게 될 때, 그 모든 의무를 포기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무감]으로는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의무]로만 일하는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쉽게 물러서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의 기쁨]은 무엇일까요?
[바울의 기쁨]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들이 생길 때, 생겨난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려고 하지만, 그럴 때,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에서 모든 [의무]를 ”기쁨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해야 하는 일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의무를 포기하게 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긍정할 뿐만 아니라,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방인)에게 전하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 복음을 때로는 힘 있게 전하기도 했지만, 전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임무가 어려운 상황에 부딪혀 포기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그는 기뻐했습니다.
 
 
바울이 ”의무가 기쁨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12절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보십시오. “형제들이여, 내가 당한 일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온 사실을 여러분이 알기 바랍니다.”(빌 01:12)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통해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복음의 진보]란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서 복음을 전해야 함에도,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제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사역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통해서도,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발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2년이 넘게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상생활에 장애를 겪고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심각한 재난과 고난이겠지만, 그러나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 재난은 선교에 있어서도 큰 장애물입니다. 많은 선교사님들이 [만남의 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또 때로는 확진되어 소천하신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지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러나 이 코로나 팬데믹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큰 전염병 시대가 지난 이후에, 혹은 이런 세계적인 대재앙 이후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물질문명에 독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이 재앙들을 통하여 마음을 가난하게 하며,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기도 합니다.
 
▶[참된 교회]는 어떤 모습입니까? 
온 세상에 전해지는 [복음의 의무]가 의무를 넘어, 기쁨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파의 의무를 기뻐하는 교회”입니다.
 
 
“복음 전파의 의무”나, “이웃을 사랑하는 의무”가 부담으로 여기지 않는 교회,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말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우리의 모습에 먼저 귀를 기울입니다.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듣기 전에 우리의 모습을 먼저 보게 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래 지속 된다.”고 가장 먼저 선교사님들의 후원을 끊고, 철수하고 포기하는 교회라면, 세상은 그런 교회를 보고, 뭐라고 평가할까요? 
 
바울은 자신의 [매임]에서, “세 가지 형태로 [복음의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평가합니다.
(1) 첫째는 자신의 [매임]을 통해, “복음이 로마의 친위대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는 진보를 가져왔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13절의 말씀 같이, “내가 이렇게 사슬에 매인 것이 온 친위대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어요. 그때는 놀라운 지진으로 감옥의 문이 열렸어요.
그래서 복음이 간수와 그 가족들에게 전해졌어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내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전해진 이 말씀은 빌립보의 감옥 문이 열리면서, 바울과 신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찬양했을 때, 감옥 문이 열리면서 두려워 떠는 간수와 가족들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그런데 [로마 감옥]에서는 그러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것은 감옥의 문은 굳게 닫혔서 열리지 않았어요. 그것이 바울이 찬양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바울이 기도하지 않아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은 더 이상 바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는 옥문을 기적으로 열어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거고, 
[로마 감옥]은 굳게 닫혀 있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을, 또 하나의 [하나님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가장 우선적인 기회는 그 감옥을 둘러싸고 있는 로마의 친위대들 바울을 감시하기 위해, 때로는 음식을 갖다 주기 위하여, 바울을 갇힌 상태로 두기 위하여, 있는 이 친위대들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결코 만날 수 없었을 바로 그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 둘째로,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많은 형제들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게 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했습니다.
 
14절의 말씀에, “많은 형제들이 내가 매임으로서 인해서, 주를 신뢰함으로 두려움 없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빌 01:14)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답답함이고, 힘겨운지를 잘 모릅니다.
 
중국 정부는 지금 인터넷상으로도, 영상으로도, 복음을 나누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어요.
그러나 중국 역사를 되돌아보면, [허드슨 테일러] 시대에도 중국의 선교사들이 수백 명이 추방되어서, “이제 중국 선교는 끝이 났다.”고 여겼지만, 오늘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들이 조직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가정교회]로 존재하고, 요즘은 [미형 교회]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 교회를 ”형태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고,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미 공산주의 체제는 ”[복음의 역사]를 가로막는 일에 실패했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 중국 정부는 심지어 성경까지 공산당에 입각한 것으로 다시 써서,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제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는 시도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자]들을 가둠으로써,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이들이 더욱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지요.
도리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체제 안에서는 너무나 자유롭기에,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죠.
 
동유럽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구금과 고문, 그리고 처형으로 교회가 위축되는 것 같지만, 
결국 문을 닫은 것은 [교회]가 아니라, [권력]이었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 독재 정권이 교회를 짓밟으려고 노력을 기울였지만, 1994년 통계에 의하면, “감리교회가 6천 명 미만에서 5만 명 이상으로 더 성장했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핍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난과 핍박 속에 있는 교회들이 더 거룩하고 성결하게, 성장했습니다.
 
1934년에 나치 정권의 왜곡된 [악]에 대하여, 맞서 싸웠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본 훼퍼] 같은 지도자도 처형되었지만, 그런데 독일 교회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형제들은 더욱 담대하게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북한에서도 대외 홍보용 교회 외에는 다 사라진 것 같지만, 지금도 홀로 믿음을 지키는 구루터기 성도들이 틀림없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고 계시고, 그 백성들이 때로는 고난과 매임에 처하게 되지만, ”결코 그 상황이 [복음의 진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그렇게 고난을 이기고, 모든 상황을 이기며, 전파되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팬데믹이 복음 전파의 영향력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이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수많은 영혼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3) 셋째는 가장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바울에 대하여 시기와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이 이제 매여 있으니, “이제는 우리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아주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나쁜 동기]를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죠.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도 ”우리는 경쟁심으로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본문 15절에서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또 어떤 이들은 좋은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좋은 뜻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움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전파하지만, 시기와 다툼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갇힌 것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나는 이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빌 01-15-18)
 
어떤 이들은 선한 뜻과 선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지만,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마음속에 시기와 경쟁심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죠. 그러나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동기가 백 퍼센트 순수하다.”고 심판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순수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순수하다.“고 여기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에도 언제나 시기와 경쟁심이 숨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동기를 보면, 언제나 순수하지 못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눈에는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 바울이 갇혀 있으므로 ”바울의 시대는 끝났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순수하지 못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
 
부천 온누리교회가 처음에 시작이 될 때, 과거에 [열방 침례교회]가 어려움을 겪어서, 그 교회 목사님이 “온누리교회가 맡아 달라.“고 요청하여, 그 일을 제가 담당하여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그 때, 부천 지역의 목사님들을 찾아다녔는데, ”처음에는 교인들을 빼앗길까봐 걱정을 했었는데, 깊이 생각해 보니 우리가 더 열심히 목회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이 불완전 함에도 사도 바울이 기뻐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를 어렵게 하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2022년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를 ”피하고 싶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피하지 말고, 기쁨이 되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