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갈6:1~18) 말씀: 이재훈 목사님
이제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6장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성탄까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 하려고 하니, 중요한 말씀만 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주신 [결론 부분]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나? 에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나는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에서 [자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은 본문 6장 14절에 이 [자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갈 06:14)
여기서 [자랑]이라고 번역한 것은 사실 우리말로 꼭 맞게 번역할 수 있는 동의어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랑]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자랑]이라는 뜻은 “영광을 구하다, 어떤 것을 크게 기뻐한다.”는 등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랑]이라는 말에는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①첫째로, 나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있고,
②둘째로, 생각만 해도 기뻐서 삶에 의욕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있고,
③셋째로, 자신이 의지하여 삶의 중심이 되어,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이 [자랑]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을 사로잡고 있으며, 사도로써 삶에 의욕을 느끼게 하고, 삶의 중심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 말할 수밖에 없으며, 누군가에게 전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사도 바울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이 “무엇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아까 읽었던 14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내게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해 그러합니다.” 라는 고백에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 틀]이었고, “중한 죄인을 죽이는 [극악한 도구]로 사용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십자가]를 보고,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거나, [수치감]이 느끼는 도구이므로, [십자가]는 그냥 머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할 만하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또 가장 [고상한 디자인]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의 모양”을 [악세사리]로 목에 걸고 다닙니다.
▶왜, 그렇게 변화 되었나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구원의 은혜]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이유”에서, 그는 “십자가에 세 가지를 못 박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1)첫째로/ [십자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단지 “예수님의 죽음”만이 아니고, “우리 주님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 속에는 그냥 덧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 [말] 속에는 “사도 바울의 신앙 고백”이 들어 있고, 동시에 [우리들의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를 온전히 뒤집어쓰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심으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고, 정반대로 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묘하게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철학과 이론으로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고, 또 그분이 바로 “사랑으로 용서하신다.”는 것이 하나 된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는 “가장 강력한 능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도저히 변화될 수 없었던 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죄를 끊게 하시고, 죄를 이기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고,
“그렇게 변화 시키는 능력“이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십자가의 능력]이니까,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았기 때문에,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둘째로/ 그 [십자가]가 내게 대해, 세상을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힌 중한 죄인처럼, 그렇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향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아, 너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종처럼 노예로 만들어 버렸지만, 나는 더 이상 [세상의 종]이 아니다.
세상은 나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은 나에게 결코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고 외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평가]를 두려워하지만, 이 세상에 의하여 잘못 판단되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가진 [대중적인 신념]이나 [시대의 풍조나 흐름]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그 평가와 시선을 두려워하며, 거기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들은 [복음]을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철학의 아류] 정도로“ 그렇게 여기고, 사람들을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세상마저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내게 대하여 세상을 못 박았다.“고 역설합니다.
세상은 나에게 어떤 영향력도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 내게 대해 세상이 못 박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십자가 사건]을 “세상을 못 박힌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세 번째로/ 또 다른 시각으로 “[십자가]가 세상에 대해 나를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에서 여러 번 강조하신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그분만 홀로 못 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함께 못 박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대해 죽으신 것처럼, 나도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 나는 세상에 대하여도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세상과 ”서로 연합된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삶이 되었다.는 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존재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여,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공개가 되면,
혹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를 걱정하며 숨어 지냈습니다.
[정교도]인 [옥타비우스 윈슬로]라는 분이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했기에, 그 십자가를 전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지는데, 어떠한 수고와 핍박과 고난도 기쁘게 감당을 했습니다.
그중에 바울을 가장 염려하게 하고, 아프게 했던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그 교회 사람들이 육체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육체의 종]이 되어버린 그들을 보면서, 바울은 안타깝게 생각습니다.
[십자가]의 시각으로 볼 때에, [악한 사람]들만 공경에 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도 공경에 처합니다. 그들은 종교와 도덕에 갇혀, 십자가를 깨닫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가장 도덕적인 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또 가장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십자가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겉모양을 따라가는 인생이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어요.
12절의 말씀을 보면,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으려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없는 도덕]은 결국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인간의 [선한 행위]나 어떤 문화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해 줍니다.
그래서 할례를 강요하고, 믿음 외에 인간의 선한 행위를 강조하는 그들에게 바울은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바울이 편지를 보낼 때에, 누군가에게 구수를 통해, 받아 적도록 했으나,
11절부터는 자신이 직접 펜을 들고, “마무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11절부터 바울이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하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이고,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의 말씀을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습니다.”(갈 06:17)
사도 바울의 몸에는 수많은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흔적]은 많은 위험과 죽음의 고통을 넘나들며 받은 [고통의 흔적]입니다.
수많은 매를 맞고, 옥고를 치르며, 그의 몸에는 수많은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함께 죽고, [십자가]를 전하며, “[십자가]를 자랑하며 얻은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흔적]이라는 단어는 당시 헬라 사회에서 “종에게 낙인을 찍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이 단어를 통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낙인찍힌 존재이고,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시 [할례]와 같은 것으로, 흔적을 남겼지만,
“그런 외적인 흔적은 결코 참된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고, 또 나에 대하여 세상이 죽은 그 [십자가의 흔적]만이
참된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런 증거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①”지우고 싶은 인생의 흔적“이 있고,
또 반면에 ②”자랑하고 싶은 인생의 흔적“도 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속한 자신의 모든 흔적은 지우고 싶었고, 오직 십자가와 관련된 흔적만이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흔적, [십자가의 흔적]만이 영원히 남을 흔적이기 때문이에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몸에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그것은 예수님의 양손과 옆구리에 ”창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아간 우리의 삶의 흔적만이 영원한 흔적이 됐고,
”그것이 우리는 영광스러운 상처”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이 땅에서 아무런 상처 없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 혹시 핍박을 받을까 봐,
어떤 멸시를 받지나 않을까, 세상을 두려워하며 자신을 숨기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늘로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훈장이 아니라, 상처를 조사하실 것이다.”라는 말을 들려 주셨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어떤 훈장을 받았는가?”를 조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얼마나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를 살펴보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다가 얻은 흔적“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상속자“이니까, 세상에 종노릇하지 말고,
우리가 주도적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고,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는 의미 있는 아름다운 흔적을 가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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