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함을 사랑하십시오. (갈5:1, 13-15) 말씀: 이재훈 목사님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은 자유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으려고 할 때, 고민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①그것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속박을 받는 것이다”는 것이고,
②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제한을 받는 삶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오해입니다.
기독교는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자유를 주는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은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갈5:1)
갈라디아서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굳건히 서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쓰여 져 있습니다.
▶여기서 “굳건히 서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면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당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자유를 누리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 선택에,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자신을 포로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을 포로로 가두어 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그 선택으로, 자신이 갇혀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선택한 자유 의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자유 의지는 타락한 것이므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가 1524년 9월에 자유 의지론에서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진리를 공격합니다.
이것이 종교 개혁 시대에 일어난 자유의지 논쟁이지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의 자유 의지의 상태에 대해, 요한복음 8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은 루터의 의견을 더 지지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더욱 자신을 죄에 메여 있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5장 13절에서, ”형제들이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십시오.“(갈5:13)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중세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란 거의 없었습니다.
그것은 신분 사회에 묶여서, 평생을 살다가 죽어야만 했고, 근대 사회로 넘어와서 이제 새로운 자유민주주의가 왔는데도 오히려 사람들이 그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도피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근대 역사에 여러 독재자들이 출연했고, 사람들이 그 독재자에 순응하는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리크롬이라는 독일의 사회심리학자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정치적으로 제도적으로는 자유를 누리지만, 온갖 사회의 문화 속에 죄의 문화 속에 중독되어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많은 것들에 얽매여 쾌락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지 않는 의지는 선택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것은 죄의 종이 된 상태이므로, 자신도 알지 못하고 지냅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이런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바로 이런 노예 상태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오셔서,
우리들에게 새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게 하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 안에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겁니다.
바로 이 새 생명이 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말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1)첫째로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는 ”두려움 없는 양심의 자유“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끊임없이 두려워합니다.
왜, 두려워합니까?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양심이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양심이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양심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이미 심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우리의 양심은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에 대한 진노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워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 말씀에도,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기 때문입니다.“(롬8:1-2)
그리스도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이제는 우리를 생명의 법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그리스도가 담당하셨기에, 우리가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그것은 죄가 있음에도 뻔뻔하게 행동하는 그런 양심이 아니라, 화인 받은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2)둘째로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는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가 ”자신의 선택에서 나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종 가운데 있는 영혼들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며, 그 하나님의 약속에 믿음으로 순종으로 응답할 때,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자유예요.
그러니까 ”순종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6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벧전 02:16)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자유와 모순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면, ”내 자유는 어디 갔느냐?“고 항의하지만,
그것은 ”나의 자유와 순종이 서로 대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내 주권 아래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면, 우리의 자유와 순종은 ”서로 모순된 것“이 아니라,
”자율“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자율이 좀 용어가 비슷하지만, 좀 엄격하게 구분을 해 보면,
자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신이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율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순종할 때, 자율은 없지만, 자유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반대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주권에 의존하고 순종할 때, 자유는 분명히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주권에 기쁘게 응답하는 자유,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
그것이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만물이 존재하는 곳에는 다 주어진 질서가 있고, 제도가 있고, 법칙이 있어요.
물고기는 물에 살도록 돼 있고, 새는 하늘을 날도록 되어 있고, 모든 존재하는 것에는
하나님의 질서에 의하여 만들어 졌으니까, 그 질서에 순응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이 시대에 사상적인 큰 흐름으로 ”주어진 질서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 기분, 노 리미트, 그러니까 ”제한도 없고, 주어지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모든 것에 ”자유를 선언하는 행태“가 나타납니다.
이런 사상적인 근거로, 남자와 여자 이외에, 소위 사회적 성을 만드는 거예요.
인류 역사상 남성과 여성의 염색체 이외에, 다른 염색체가 발견된 것이 있으면, 제시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장하는 ”제 3의 염색체“는 발견된 바가 없는데도 ”있다“고 주장하고,
남녀 이외에, ”제 3의 성이 있다”고 억지를 폅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자유를 주셨으나, 그 자유가 유지되기 위한 룰을 주셨어요.
그것은 법칙을 주신 겁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중앙에 있는 한 실과는 먹지 말라 하는 룰입니다.
그 룰은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율을 선택한 거예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유를 누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인간의 주권을 선언한 거예요.
그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왜, 인간이 타락했을까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인간의 주권을 내 세웠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자유는 하나님의 질서 아래에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믿음으로 순응해야 합니다.
“율법은 순종하라“고 강요했지만, 우리의 옛 사람은 순종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거예요.
▶왜 기도하고 싶으니까?
그것은 기도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3)셋째로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는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15절의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형제들이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지 말고, 도리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십시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이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한마디 말씀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삼키면 피차 멸망할 것이니, 조심하십시오.(갈5:13-15)
여기서 자유를 “육체의 만족으로 삼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은 ”육체의 만족을 위한 기회로 삼는다.”는 것은 타락한 쾌락과 방종을 의미하고, 그런 자유뿐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시험 들게 하는 경우도 포함이 된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자유는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는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의 자유함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도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유”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종노릇하는 헌신“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양심의 자유를 우리들은 허락 받았으니,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육신의 탐욕으로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웃에게 종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만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다면, 이웃을 종처럼 섬기지 못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됐습니다.
이는 내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고전9: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입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는 양심의 자유를 허락받았고, 또한 우리들은 즐겁게 순종하는 자유를 알았으니,
우리들은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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