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갈4:12-20) 말씀: 이재훈 목사님
사람들은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서 하나”로 생각을 하거나,
기독교를 단순히“예수님을 본받는 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성경의 어디에도 그런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 사람을 죽여야,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얘기하면, 자신의 옛 사람을 못 박아 죽임으로써, 우리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부활의 능력]으로, 새 생명으로 태어 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원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 가야 한다.”는 말이지만,
죄인된 우리가 달라지려면, ”우리 안에 있는 옛 사람을 죽이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드렸을 때에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강하게 말씀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짓된 선생이 나타나서 거짓 복음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오히려 거짓 선지자가 나타나서 모세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율법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산 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방으로 그치지 않고 재생산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면, 가능해 집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날 때에 어머니의 산통이 따르듯이,
새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려면, 해산과 같은 고통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고통이 따라야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까지 사도바울은 논쟁하면서 책망을 하지만,
오늘부터는 개인적인 성도들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장 19절의 말씀에서, “자녀들이여,”라고 부르는 것에서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르는 이 호칭에서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12-15절의 말씀에서도 “성도들과 관계가 영적인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고,
13절에서“여러분이 알다시피, 내가 처음에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을 여행하면서, “어떤 질병을 가졌다.“고 추정을 합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이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볼 때는 시험꺼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강건한 육체로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바울은 연약한 몸으로 나타나니까,
어떤 사람은 ”정작 자기 자신의 질병을 고치지 못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그 지역에서 오래 머물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그 약함으로 인하여,
더 큰 은혜를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쓰임 받은 분입니다.
일주일에 3번을 투석하는 환자가 일본에 가서 러브쏘나타를 진행할 때에도 힘이 없어서,
의자에 앉아서 설교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 사람들은 감동했던 것입니다.
그런 힘든 몸으로 ”일본 전역을 돌아다닌다.”는 사실에, “일본 목회자들이 더 슬퍼했다.”는 추억입니다.
▶왜, 이것이 복음의 증거가 됩니까?
세상의 성공하는 스토리는 형통함으로 자신을 자랑하지만, 복음의 역사는 약함을 통해서 증거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연약한 모습으로 못에 박히셨지만, 그러나 “부활의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 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바울의 육체의 연약함 때문에, “바울을 천사처럼” 사용하신 것입니다.
15절의 말씀을 함께 읽으십시오. “그런데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만약 할 수만 있었더라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갈4:15)
▶여기에,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눈을 빼서 줄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사람들은 바울을 원수처럼,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닌, 왜곡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16절의 말씀에서도 확연하게 토로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됐습니까?”(갈4:16)
참된 진리를 전하는 사람은 스스로 복음을 발로 차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배척하는 사람”입니다.
요즘에도 “교회가 정치 논리에 말려들면” 안 됩니다.
우리는 가까운 관계일수록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는
“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합니다.
①하나는 “이간질 하는 것”이고,
②또 다른 것은 “자기를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자신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생활의 목표를 다시 설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모습”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루어지기까지, 우리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①첫째로 우리는 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하고,
②둘째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서로를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복음은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교회”가 되어야, 그렇게 해야 우리에게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바울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지 않기 위해, 늘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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