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종인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갈3:15~29) 이상준 목사
사도 바울이 구원도 소명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앞부분에서 이야기를 했는데요.
오늘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의 종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와 함께 살 것인가? 그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라는 것입니다.
15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사람의 예를 들어 말합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한 번 맺은 후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덧붙일 수 없습니다"(갈3:15)
사람과의 약속일지라도 그 약속은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죠. 영어로 약속을 지킨다라는 말을 Keep Word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약속이라는 단어를 말이라는 단어로 사용한 것이죠. 그러니까 이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이 말하는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은 크게 두 가지 요소 내용과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소리나 글자라는 형식보다도 그 의미와 실체를 담고 있는 내용이 본질적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말을 할 때 말을 그냥 겉으로 멋지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말하는 것을 진심으로 진정성 있게 의미하며 말하는 것인지를 보면 그 사람이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언어와 글자에 좀 민감한 편인데요. 그러다 보니까 내가 정말 말하는 대로 사는가 자체 점검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제 주일 광고를 하잖아요. 그런데 엔젤트리에 동참하십시오 그리고 간곡하게 얘기를 하면 저부터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해부터 계속 저는 저희 자녀들하고 함께 사랑을 선택하고 선물도 고르고 그런 하고 있어요.
팬데믹 기간에 사랑의 쌀 러브미를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데 다시 재개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대에 요즘 같은 때 쌀이 부족한 사람이 굉장히 있습니다. 정말 상황이 어려우신 분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쌀을 모아서 전달을 하는데요. 제가 너무 이 광고를 한 번 두 번 이렇게 하다 보니까 제가 안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원래 이제 그다음부터 집에서 쌀을 갖고 오게 됐는데 주일날 일찍 설교 준비 예배 준비 그러고 쌀도 챙겨 오라니까 정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예 쌀을 한 포대 사다가 제 방에 갖다 놓고 가지고 나옵니다. 제가 만약에 바람대로 살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목회자가 아니라 종교적인 선동과 일 뿐이겠죠.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지켜야 하는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밥 한 번 살 때 이렇게 얘기하면 그 말을 끝까지 지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편이에요.
오늘 15절 하반절에 보면 사람의 언약을 무효화시킬 수도 없고 덧붙일 수도 없다. 이야기합니다.
말을 안 지키는 것도 문제지만 말을 덧붙이는 것도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분이 말하는 것을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 신뢰가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을 너무 과장되게 해도 신뢰가 안 가요 그러니까.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 배려한다고 과도한 칭찬 잘 하잖아요.
저는 과도한 칭찬을 하면 기쁘고 고마운 게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을 앞으로 믿어도 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좀 피곤한 인생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런데 다른 말은 재현하고 저는 여러분이 신앙에 관해서만큼은 원칙주의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자 하고자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도 신실하기를 원하세요.
이어지는 16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약속을 주실 때 여러 사람을 가리켜 "자손들에게"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에게"라고 하셨는데 이는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갈3:16)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을 주실 때 자손들이라는 복수 형태가 아니라 자손이라는 단수 형태를 쓰셨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실제로 구약의 구절들을 보면 창세기 13장 15절 "보이는 이 온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주리니" 창 17장 8절 "내가 너와 내 후손에게 단수에 내가 고려하는 이 땅과 가난한 온 땅을 주어"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법적으로 복수가 아니라 단수가 맞습니다. 하지만 문맥을 보면 이 자손이라는 단어는 자손들을 의미하는 집합적인 개념이에요. 사도 바울이 이런 불법적인 것을 몰라서 이런 논리를 폈을까 그건 아니겠죠.
그런데 이 갈라디아서의 출신인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사는 이방인 크리스찬들이 대부분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당시에 이 사람들이 따랐던 로마법 때문에 이렇게 표현을 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로마 법에 의하면 유산을 상속할 때 단 한 사람에게 상속자에게 상속을 해주고 그를 통하여서 다른 상속자들에게 이어지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단 한 명의 상속자 이삭이 있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단 한 분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열망에 이르게 된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입니다.
창세기 1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 만민이 모든 민족이 너를 통하여서 복을 얻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 복은 복 중에 가장 중요한 복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수렴되고 신약의 모든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로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 약속의 핵심이 되고 정점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세요. 다른 그 누가 예수님 왜 주인공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이 종교 생활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요. 그 이유를 또 설명하는데요.
17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에 의해 미리 정해진 언약을 무효화해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갈3:17)
그러니까 율법 책으로 430년 이후에 모세의 율법이 왔으니까 이 율법은 아브라함의 언약과는 시기적으로 상당히 후대라는 것이죠. 언약이 율법보다 우선을 하는데 율법이 언약을 어떻게 뒤집을 수 있느냐 이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놓고 생각을 해보니까 사회에서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이 됩니다. 계약이 있고 규정이 따라가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프로 운동 선수가 있는데 한 구단에서 한 운동팀에서 당신은 우리가 이런 규정을 갖고 있으니까 이 규정을 지켜라 이렇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그 팀과 계약을 맺었을 때에만 요구할 수 있는 것 계약도 맺지 않은 선수에게 우리 팀 규정을 따르라고 얘기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약속이 규정 율법보다 우선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약속이 규정보다 창의적인 개념인 것이죠.
내가 왜 부모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그분이 나의 부모님이시기 때문에 계약이라는 것은 관계를 설정해 주는 것이죠. 관계가 설정되고 나면 그 관계에 따라서 내가 지켜야 되는 행위 규정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기 때문에 수업도 들어야 되고 학칙도 지켜야 되는 것이죠.
내가 이 회사를 다니는 직원이기 때문에 업무도 맡아야 되고 회사의 내교도 지켜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오늘날 이 시대를 보면 다원주의 지나친 개인주의 시대로 흐르다 보니까 사람들이 규칙을 지키기 싫어하는 거예요. 규정을 지키기 싫어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약속을 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 약속을 깊이 하는 문화가 그런 심리가 이 시대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결혼 후에도 결혼 서약을 하는 거 두려워하고 어떤 기간과 장기간 계약을 맺는 걸 두려워하고 교회를 다녀도 예배를 드리지만 교인으로 등록하는 걸 꺼려합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하는 순간 그 약속이 내포하는 모든 규정들을 내가 지켜야 된다는 부담감이 생기기 때문인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이 인간관계에서 정말 다치는 분에게 소중합니다. 멋있습니다. 아름답습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데 헌신하겠다는 그 관계에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주의해야 되는 사람들 있죠 어떤 사람들은 약속을 늘어놓는데 하나도 제대로 그 약속을 지키는 게 없다. 이런 사람들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거든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 명성 멋있는 모습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여러분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약속을 하지 않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조심하세요.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명성이 있고 멋있어 보여도 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은 약속하시는 분이세요. 이 약속에 대해서 좀 더 보겠습니다.
18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만일 유업이 율법에서 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약속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습니다. "(갈3:18)
18절에 은혜라는 단어에 밑줄 그으시겠어요. 요즘 우리가 많이 찬양하는 것들 그리고 유업을 약속으로 유업을 주셨다. 즉 내가 민법의 기준에 맞춰서 이렇게 행위를 잘했기 때문에 유혹을 주시는 게 아니라 그냥 약속으로 주셨다. 이것은 은혜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의 유혹을 약속하셨어요. 그 세 가지는 땅과 자손과 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후대에 다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는데 첫 번째 땅은 약속의 땅이 가나안 땅을 주셨고요 자손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주셨고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어요. 그리고 복은 약속하신 대로 구약의 내내 죄 가운데까지 타락하고 무너져 있는 내 백성을 구원하리라. 구원의 약속을 이루셔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도록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세요. 아내이야 너무나 감사한 것이죠. 제가 처음 하나님 인격적으로 만나고 중학생 때 성경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이 성경은 약속으로 도배가 돼 있구나 왜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을 남발하셨지 다 지키셔야 되잖아요. 말씀하신 것은 그대로 지키시는 분이니까 제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10대 때는 잘 몰랐지만 2학년 3학년 4학년 이렇게 되면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시키지 않아도 약속을 하게 되는구나 약속을 해 주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읽고 있는 이 성경이 구약과 신약 약속의 책이 된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약속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하나님의 약속을 캐내는 것은 다이아몬드를 캐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나의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은 어떻다고요 약속을 안 지키는 사회 약속하는 것을 꺼려하는 사회로 가고 있어요. 왜 현대 사회가 계약서가 복잡해질까요. 굉장히 문명이 발전한 사회라서 그런가요 어떻게든 법적으로 이 법망을 피해서 약속을 안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계약서가 복잡해지는 거예요. 결혼을 해도 혼인 신고하는 거 꺼려하는 이런 시대 마지막 때에 어떻게 될 것인가 기모데 후서 3장에 이야기합니다.
말세의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에는 충만하다는 거죠. 부정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신하며 인간관계의 신뢰를 깨뜨린다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냥 표면적인 쾌락과 행각에 빠져 사는 시대가 된다라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방식을 따라가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가셔야 돼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랑에 빠져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왜 아메나 했다고 할까 이제 한 분이 아내는 숫자는 왜 갑자기 사랑에 빠져 사랑에 빠져 사시고 그리고 결혼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신 분들 또 하라는 것이아니라 안 하신 분들 꼭 결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서약을 하고 사셔야 돼요 결혼은 미친 짓 아니냐? 미친 짓입니다. 인생을 거기에 다 걸어야 되잖아요. 앞으로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안다고요 근데 거기에 인생을 다 버는 거예요. 그렇게 그 사랑의 맹세에 여러분의 전 인생을 다 쏟아부으면서 사세요. 그럼 너무나 리스크가 크지 않느냐? 요즘은 다 리스크 매니지먼트 하기 위해서 보험 들고 여러 가지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누구도 그런 위험 부담을 떠안으려고 하지 않아요.
그러나 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에게 미치지 않으셨다면 구원 못 받는 거예요. 하나님이 당신에게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시는 말도 안 되는 크레이지 러 미친 사람으로 하신 거잖아요. 그 사랑이 알고 있다고 우리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사랑은 함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구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품성이고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의 방식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야 되는 것이죠.
두 번째입니다. 약속의 주인공이 모시었다.
19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입니까? 율법은 약속된 자손이 오시기까지 죄 때문에 더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해 한 중보자의 손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중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 이십니다." (갈3:19,20) 자 율법이 도대체 무엇이냐? 약속을 주셨고 약속의 자손 그리스도가 오셨다면 그 약속과 약속의 자손을 바로 이으시면 되는데 중간에 왜 율법이 끼어지도록 만드셨느냐라는 거죠. 그러니까 율법은 중간에 다리 역할을 한 것입니다.
좀 정리를 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죄 해결에 영구적인 해결책이 되어 주시겠지만 율법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임시적인 해결책 역할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한 번 죄를 지으면 한 번 짐승의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 해결했던 거예요.
19 하반절과 20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서 물론 우리는 시내산에서 하나님 모세에게 주신 것으로 돼 있는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이야기한 것도 그렇고 오늘 바울이 이야기한 것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서 모세에게 계시해 주셨다고 봅니다. 그래서 천사들을 통해 한 명의 중보자인 모세를 통해 주어진 것이지만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권적으로 직접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보다 탁월한 것이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21절 말씀 율법보다 약속이 더 좋은 이유를 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반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주어졌다면 분명히 의의는 율법에서 났을 것입니다. "(갈3:21)
21절 하반절에 여러분 성경에 생명의 두 단어에 동그라미 치시겠어요.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될 수 있느냐 ?상관될 수 없죠. 양다리라는 것은 부딪히는 양쪽에 걸쳐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해결해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의 약속 복음과 연속 선상에 있는 것은 맞아요. 다만 율법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임시 방편책이라고 그랬죠? 왜냐하면 21절 한마디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율법은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고 완전한 생명을 줄 수가 없어요.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정리해서 보자면 율법은 정제의 기능을 하는 것이고 복음은 속죄의 기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사람을 정제해서 죽이는 일은 있어도 그 죄를 없다고 해주고 해결해 주고 살려내는 기능은 없다는 거예요.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화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 계시죠? 주기철 목사님과 더불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두 분의 목사님이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 많은 좋은 임지를 놔두고 여수의 나환자촌 애양원에 가서 섬기시죠 그리고 이곳을 나환자들의 천국으로 만드셨어요. 참 아름답게 섬기셨는데 1948년에 여순 반란 사건 때 이 동인, 동신 두 아들이 공산당원 청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 가족과 애양원에게 있는 모든 식구들이 슬픔과 분노에 빠져 있는 가운데 손 목사님은 좀 다른 행보를 하셨어요. 자기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이 체포가 되어서 수감돼 있고 재판부에서 이 청년을 사형을 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재판정에 가서 손양원 목사님이 재판관들을 설득한 것은 내 두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마십시오. 오늘날 젊은이들이 이 사상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소중한 두 생명을 잃었는데 또 한 명의 소중한 생명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제 아들로 입양하겠습니다. 이 청년을 제가 설득하고 변화시키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구명을 해서 그 재판관원들을 설득해서 무죄로 풀려나게 됩니다. 살인자가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대로 법대로 적용했다면 이 청년 정죄를 받고 삶을 당하는 게 마땅한 거잖아요. 율법이라는 건 사람을 살려낼 수 없어요. 사람을 죽이는 기능은 있어도 그러나 손 목사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배속의 사람을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기 때문에 놀라운 사랑을 베풀고 그 아들을 그 청년을 아들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상황에서 과연 배울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 안에 이런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이 있는가?
22절에서 25절 이어지는 말씀을 또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이는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공부한 약속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메어 장차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일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는 선생이 됐습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라는 선생 아에 있지 않습니다. "(갈3:22~25)
긴 얘기는 했지만 사실은 한 가지 얘기를 하고 있어요. 여러분 또 여러분 성경에 22절의 죄 아래에 문체를 보르시고 23절에 율법 아래에 문체를 보시겠어요. 이 두 가지가 같은 의미로 묶여 있고요. 그리고 23절 하반 절의 믿음의 때까지 거기 밑줄을 그어 보세요. 24절에 그리스도의 때까지 밑줄을 그어 보세요. 두 가지가 동일한 의미가 하나님은 모두를 죄 아래 율법 아래 가두어 주셨다. 누가 오시기까지 믿음의 주이신 주인공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입니다. 그러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율법은 예고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공편이신 거죠. 내가 본편 영화를 담고 예고편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는 거예요. 율법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매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신 거예요. 그 중매자가 신랑의 신부 이렇게 소개를 해 주고 그 자리에 계속 앉아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다음에 또 이 두 사람이 만나는데 또 그 자리에 또 나타나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율법은 소개해 주고 빠져야 되는 거죠. 거기까지의 역할 겁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예수님과 교제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다시 중매자인 율법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그것은 중간에 매개 역할을 해주는 것뿐이지 사랑의 대상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착각하는 것은 그건 사랑이 아니라 착각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죠. 젊은이들이 로맨스 영화에 푹 빠져서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거예요. 미래 사회에 지금 우려가 되는 것은 AI로 만들어진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서 진짜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되는 거 여러분이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선물에 빠져 있거나 그 사람의 사진에 빠져서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이거는 사람이 아닌 것이죠. 자기 감정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상상 임신 상상 연애처럼 상상 신앙 상상 구원에 빠져 있는 성도들이 있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격적인 교재의 자리로 초대하시는 거죠. 이제는 집으로 돌아와라 우리가 함께 거하고 함께 이 기쁨을 나누자 그런데 집을 나간 둘째 탕자에게만 그 얘기를 하시는 게 아니라. 종처럼 충성을 다했던 첫째 아들에게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갈라디아서는 둘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첫째에게 보내는 편지인가요? 너무나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는 율법주의자들 첫째 아들들에게 보내는 거예요. 예배를 드리고 매주일 예배 드리고 교회 봉사 열심히 하는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거예요. 그 탕자의 이후의 마지막 반전은 탕자는 은혜로 집에 앉아 있고 열심히 충성했던 큰아들은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지 않아요. 아버지 집을 떠난 거예요. 요즘 냉담에 빠져서 교회를 던지고 교회를 안 나오시는 분들이 있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운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 두려워하는 부모로 살 것인가? 사랑받는 자녀로 살 것인가? 26절과 27절을 읽겠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됐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입니다. (갈3:26~27)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27절에 말씀한 것처럼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죄인 이상준으로 보시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나의 자녀 죄의 형제가 다 씻음 받은 나의 자녀 이상적으로 주시는 것이죠. 이런 놀라운 구원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28절에 말씀합니다.
" 유대의 사람도 없고 그리스 사람도 없고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갈3:28)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교 자유인도 남자도 여자도 아무런 차별이 없다. 차별 금지법 같은 걸로 차별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은혜가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 베푸시는 은혜에는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을 넘어서는 진정한 은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율법으로는 차별을 없앨 수 없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죠. 법이라는 것은 정제의 기능이기 때문에 사실 누군가를 또 다른 사람들을 잘못됐다고 쳐내는 것이지 차별을 또 다른 차별을 만들게 돼 있지 차별 자체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시대가 성수자를 차별하지 못하도록 이걸 반대하는 다수자들을 법적으로 제재하면 역차별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면 또 그 역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것이죠. 앞으로 만약에 이런 내용들이 법적으로 제정이 되면 동성애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발언을 하거나 동성 결혼 내 주례를 거부하거나 동성애자를 목사로 안수를 주는 것을 거부하면 법적 제재를 당하고 체포당하게 돼 있어요. 목사가 교회가 벌금을 물고 교회가 문을 닫아야 되는 상황까지 올 수도 있어요. 진정으로 차별없는 세상은 율법으로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진정으로 차별 없는 세상은 십자가의 은혜로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가장 큰 해를 입힌 그 죄인을 끌어안은 것은 그냥 그거는 죄에 해당이 안 됩니다. 죄로 분류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거 말고요 인간적인 관용 똘레랑스로 해결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임이 분명하지만 그 죄인도 끌어안아주시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버리기 때문에 자격이 없어지는 거예요. 모두를 끌어안을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해서 내가 교회에 인정받아 보겠다. 그건 불가능해요. 종교 생활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열심히 한 만큼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그 심리가 결코 만족이 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 교회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고맙지만 열심히 일하는 만큼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하게 돼 있어요. 나는 이렇게 종교적으로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교회에서 왜 저런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다른 사람들 미워하고 용납하지 못하는 큰아들의 마음이 생기게 돼 있어요. 탕자의 형처럼 은혜는 없이 기준과 법만 강조를 하면 아버지에게는 충성을 다했을지는 모르지만 동생을 미워하고 밀어내게 돼 있고 소외시키게 돼 있고 자기의 내면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어요. 이런 위험의 사람들은 은혜가 메마르게 되고 언어에 가시가 묻히게 됩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고 교회 봉사도 그렇게 많이 했는데 여러분이 자꾸 언어의 가시가 놓친다 1년이 메말라가는 그러면 정직하게 자기 정권을 하셔야 돼요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율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을 선택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복음대로 살면 하나님의 자녀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는 종으로 율법을 선택하며 살겠는가라는 것이죠. 제가 아까 이제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저도 어렸을 때는 제가 20대 30대까지도 손양원 목사님이 그 얘기까지만 알았어요. 그러나 최근에는 그 손 목사님의 손자가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밝히면서 3대에 걸친 이야기를 우리가 다 알게 됐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양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하셨어요. 그래서 그 양아들이 신학교를 실제 갔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명석한 청년이어서 교수들에게 참 칭찬을 많이 받는 그런 청년이었어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가 될 마음을 가져보았지만 그 죄의 무게들 살인자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는가?자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그 율법의 무게에 주요려서 결국에는 모태를 못했고 자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숨어서 살게 그러다가 그 자기 정제의 그 영혼의 무게와 아픔 때문에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서 돌아가시게 그런데 죽을 때까지 자기 아들에게 그 얘기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자 손양원 목사님이 이제 손자의 시점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쭉 보니까 그 손자 되시는 분이 고등학생 때 교회 친구들하고 사랑이 먼저다 영화를 보게 된 거예요. 그리고는 이게 자기 집안 얘기인 줄도 모르고 너무 많은 은혜를 받으면 이게 진짜 하나님의 사랑이지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장례식장에서 친척을 통해서 내 아버지가 그분이라는 걸 알게 그런데 그 손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가정에 임하여서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게 됐다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고 목회자가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양만들들에게 내 실수를 나는 벌써 용서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먼저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 여러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생명을 건드려주시고 받아주시는 그 은혜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 사람과 그걸 받아들이는 한 사람의 인생이 너무나 다른 거예요. 왜 우리가 은혜의 공으로 시작을 했는데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결코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힌눈과 같이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만큼 나를 사랑해 주실 분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두려움에 빠져서 율법의 잣대로 나 자신을 정제하고 다른 사람을 정제하며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가 여러분 모든 것이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가슴에 술렁 얹고 눈을 감고 저를 따라서 한번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주님 이 시간 가슴에 손 넣고 기도하는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은혜의 물결로 덮어 주시옵소서 은혜가 우리 안에 먼저 충만히 채워져서 내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잘해정죄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가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통하여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모든 곳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면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살아갈 수 있는 기력과 지혜와 능력과 모든 관계를 얻어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부모님을 통해서 내게 평생을 베풀어주신 은혜 가족들을 통해 형제를 통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 이웃과 친구들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은혜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 베풀어주신 수많은 은혜가 나의 인생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은혜로 살아왔는데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정죄하며 살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나의 인생을 사로잡아주시오서 그 은혜가 흘러가며 그 은혜가 내 가족을 살리는 일터를 살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바로 한순간도 호흡할 수도 거동할 수도 없는 은혜로 채워져 있는 인생인 줄로 믿습니다. 날마다 이 은혜에 감격하고 그 은혜가 날마다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서 하나님 백성들 서 있는 그 자리마다 은혜가 상수 없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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