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말씀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약2:14~26) 2022.03.06

다이나마이트2 2022. 3. 6. 19:19

행함으로 온전해지는 믿음 (약2:14~26)    말씀: 이상준 목사님
 
오늘은 행함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①첫 번째는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다.”는 말씀이고, 
②두 번째 말씀은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본문 14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만일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겠습니까?”(약2:14)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이것은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면서, 똑같은 표현을 했어요.
 
여기서 “믿음은 행위라는 열매”를 반드시 맺게 되는데,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다.”는 것은 그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니까,
그것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고,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시작부터 좀 예외적인 상황 두 가지를 나누고 싶어요.
①첫 번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인데, “행함이 없는 믿음인데, 구원을 받는 경우”가 있어요.
 
이것은 십자가 우편에 있었던 강도처럼,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그리고 나서 바로 죽은 거죠. 
 
그런 사람 어떻게 되나요? 아무런 실천이 없었지만, 그는 그냥 죽기 전에 믿었기 때문에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 건강하고, 멀쩡하게 잘 살고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알아요.
 
그런데 나는 철저히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나는 딱 죽기 전에 믿을 거야”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것은 영혼을 걸고, 도박을 하는 셈이 되는 것이죠.
 
②두 번째는 “믿음이 없는 행함”입니다. 이것도 뭐 굉장히 민감한 주제인데,
제가 얼마 전에 [사일런스]라는 영화를 봤는데, [엔도 슈사쿠]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거죠.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사제들이 신도들이 모진 박해를 당하니까,
그 사람들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배도]를 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게 됩니다.
 
그 때에, 그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그렇게 설파했는데,
신도들이 고통 가운데 죽게 만드는 것이 정말 사랑인가? 그래서 결국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배도 행위]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혼들을 건지기 위해서, 믿음을 버렸을까요? 그것이 일본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의 행위일까요?
결론적으로 보면, 오늘날 일본의 복음화가 힘든 것은 다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말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배도의 행위]는 했지만,
그러나 믿음은 사실 이었다.”는 장면을 마지막에 보여 주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신앙을 저버리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15절과 16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매일 먹을 양식도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에게 ‘잘 가라.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라’고 말하며, 육신에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약2:15~16)
 
여기서 “형제 자매가 헐벗고 굶주렸다.”하는데, 여기서는 “잘 가라”고 했고,
개역 성경에는 “평안히 가라.”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유대인식 인사로, [샬롬]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만나는 사람이 아니고, 늘 우리 곁에서 만나는 사람입니다. 
함께 순 예배도 드리고, 자주 만나는 형제 자매를 말합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사람들을 동정합니다. 
그러나 도울 때는 지혜롭게 도와야 합니다. 말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물론, 내 형편도 어렵지만, 당신이 더 어려우니까,
당신부터 써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말만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 “내가 믿는다.”는 말은 [가짜]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기도하는 것 같지만, 그 믿음은 [가짜]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든지, 세상 사람들보다는 더 나아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 42~43절에 마지막 심판 때의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마 25:42-43)
 
여기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긍휼]을 아는 사람은 긍휼히 여길 줄을 아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저 사람 불쌍한데, “누가 도와주었으면 좋겠다.“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은 ”내가 도와주라“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주신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인가, 도와야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약 02:17)
 
그러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믿음은 깨어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혼수상태]의 믿음입니까?
 
공동체 개강하면, [순 모임]도 참석하고, 또 [봉사 활동]도 하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 [성경 공부]에도 참여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종교 활동] 말고, 정말 믿음 안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지만, 
또 다른 잃어버린 영혼을 향해서 안타까운 열정으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떤 행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 행위를 유발시킬 수 있는 본질이 “내 안에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혹시나 상처를 입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분이 순원으로 들어와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그 사람을 품어주고, 회복하도록 도와주어야 하고, 그런 [사랑]을 내가 먼저 경험을 했고,
그런 [사랑]이 내 마음 안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이어지는 18- 19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혹,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습니다.
당신의 행함 없는 믿음을 내게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나도 당신에게 나의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사실을 믿습니까? 잘 하십니다. 귀신들도 믿고 두려워 떱니다.”(약2:18-19)
 
18절에서 재밌는 얘기를 합니다. 한 사람은 “믿음이 따로 있고”, 또 한 사람은 “행함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합체가 될 수 있겠느냐?”는 얘기입니다.
 
[믿음] 따로, [행함] 따로 라는 게, “과연 가능합니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겉으로는 ”지식적인 믿음이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믿음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면,
”당신들도 구원 못 받는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의 [종교적인 지식]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유대인들처럼, ”성경 지식이 있다.“고 한들, 교리적으로 따지면서 이야기한들,
”그것이 당신을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감격“이 있더라도,
내 영혼 안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미이징 그레이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는 그냥 멜로디가 아니라,
그게 나 자신의 [인격적인 고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어서 20절 말씀 같이 읽습니다. 
”나 허망한 사람이여, 당신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되다는 것을 압니까?“(약2:20)
 
▶여기서 “허망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뭘까요?
그것이 “구원의 줄이라.”고 딱 붙잡았는데, 그게 “썩은 동아줄”이라면, 
그것으로는 “내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교회 생활을 했는데, “종교적인 실천만 강조하는 [율법주의]였다면, 그건 큰 문제입니다.
반대로, 종교적인 지식만 쌓는 영적 지식을 강조하는 [영지주의]라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을 상대하셨고, 초대교회는 [영지주의자]들을 상대했죠.
예수님은 [율법주의자]과 [영지주의 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셨고,
또 중세 교회에 예식에만 치중했던 ”로만 카톨릭의 종교 행위도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을 체험해서 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내 안에서 샘 솟아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2) 오늘,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믿음은 행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1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지 않았습니까?”(약 2:21)
 
[야고보]가 자신의 주장을 이제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인물로, [아브라함]을 예시로 듭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믿음을 통해서? 아니면,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았냐?“는 것입니다.
 
21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니까,
좀 이상합니다. 그것은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이행칭의]로 ”행함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는 예시로,
똑같이 아브라함을 사용했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한 인물을 두고,
한 사건을 두고, 두 사도가 다른 관점으로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을 ”하늘이 별과 같이 많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그가 믿었잖아요.
 
창세기 15장 6절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신칭의]이고, 그것은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 것이니까, 결국에는 [믿음의 결실]로 아들을 얻은 셈이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니까, 
”이삭이 죽으면 안 되는데,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이해는 안 되지만, 이삭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자손들을 이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리해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 같지만, 긴 인생 여정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진 거예요.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이 이렇게 사람이 성숙해 가는 것이구나 우리가 배우게 되잖아요.
 
[아브라함]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으로 믿었지만, 그러나 중간에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믿음이 연약해지기도 했었는데, 결국에는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주셔서,
믿음의 열매인 아들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5장]은 믿음을 강조하고, 22장은 순종의 실천을 강조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 그렇게 [순종하는 실천]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15장에 나오는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생활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천국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긴 여정과도 같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으로 “내 신앙생활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믿음]은 한 순간이지만, [성화]는 평생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22절에서 오늘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당신이 알다시피,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 것입니다.”(약 2:22)
 
여기서 [믿음]을 두 가지로 표현을 했습니다. 
①첫째로, “[믿음]은 행함과 동역한다.”는 것이고, 
②둘째로, “[믿음]은 행함으로 온전해 진다.“ 것입니다.
 
①첫 번째를 보면, 믿음은 행함과 동역을 합니다.
 
그럼 ”어떻게 동역하는가?“를 살펴보면,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강조해서, [이신칭의]를 주장한 것으로 보이고, 
사도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해서, [이행칭의]를 주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교리 공부]를 하면서, 머리가 좀 아프실 것이지만, 정리하면,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으로 인해서 구원받은 뒤에 ”행위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도 [바울]처럼, [행위 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구원의 믿음]이라면 [행함]은 그냥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에도, ”여러분이 보다시피,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은 아닙니다.“(약 2:22)
 
[믿음]으로도 [칭의]가 이루어지지만, 
[행함]으로도 [칭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믿음도 필요하지만,
그 믿음의 자연적인 열매인 행함도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이 여러분의 영혼에 은혜의 마중물로 부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마음 가운데, 성령의 생수가 샘솟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함]은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나타냅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데, 시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 없는 행함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것은 절대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키고 시끄럽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없는 행함은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외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주일날 교회에 왔다 갔다는 것이 아니고,, 의식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 따르는 행함을 보십니다.
26절에도,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면서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