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기도[17일차] 하나님의 선택과 아벨적 공동체 (창28:10~22) 말씀: 천종호 판사
저는 청소년들을 사랑하므로, 청소년들의 회복을 돕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제 직업이 부산지방법원의 판사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소명은 우리 청소년들을 회복시키고, 이들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사역에 관해서는 [유튜브]를 참조하시고,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 사이에서 깨달은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①하나는 창조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있고, ②두 번째는 공동체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입니다.
여기서 [공동체]에 관해서 살펴보면, 성경은 크게 두 개의 공동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굳이 구별을 한다면, [천국]과 [우리가 사는 땅]으로 구분할 수 있고,
또는 [거룩한 교회]와 [세속 사회]라고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천국과 땅]으로 구분하지 않고, “교회와 세속이라”고 구분하는 대신에, 이 자리에서는
①아벨적 공동체와 ②가인적 공동체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제가 이렇게 구분하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아벨적인 공동체]와 [가인적인 공동체]의 근본적인 차이 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공동체의 “[주권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적 공동체]는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신 공동체이고, [가인적 공동체]는 인간 자신이 주권자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1)먼저, [가인공동체]를 살펴봅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가인]과 [아벨]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제사 문제로, 장남 [가인]이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살해하는 끔찍한 폭력이 발생합니다.
이런 [폭력의 근원]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배제하고, 스스로 선악의 기준을 설정하고자 했어요.
그러니까 그 속에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동생을 살인한 [가인]을 처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인]에게 표를 주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더 받을 것이라“며 막아주셨습니다.
동생을 살해한 [가인]은 부모의 품을 떠나, 에덴동산의 동쪽에 있는 노 땅에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기서 [가인]이 태양이 떠오르는 “에덴의 동쪽을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태양신으로 대표되는 우상들을 숭배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거기서 [가인]은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높은 성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가인]이 지은 성에서 [가인의 후손]들이 태어났고, 여러 장인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결과는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저는 이런 공동체를 [가인적 공동체]라고 하겠습니다.
(2)두 번째로, [아벨적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인 [그들의 후손]들의 행적에 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행적은 [가인의 후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셋의 후손]들의 행적에는 직업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에노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 간 [에녹]과 당대에 완전하다고 일컫는 [노아] 등으로 언급 될 정도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동체를 저는 [아벨적 공동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가인]과 [아벨]의 후손들의 삶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간격이 있었는데, 그 간격의 시작은 ”그들의 삶의 주권자가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애초부터 인류의 역사는 [가인적 공동체]와 [아벨적 공동체]가 ”대립과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두 공동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속해 왔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주류는 [가인적 공동체]였고, [아벨적 공동체]는 ”늘 비주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벨적 공동체]는 절대 소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두 공동체는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벨의 첫 공동체에 소속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 중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거기에 [피조물]은 그에 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의 공동체도 모두 하나님의 예지와 섭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벨적 공동체]였다고 할 수 있는 [노아의 가족] 8명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자손들을 낳으며, 인류의 역사를 이어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대에 이르러, [아벨적 공동체]를 위한 새 시대를 여셨고, 아브라함의 아들과 손자인 이삭과 야곱을 통해, 이스라엘의 기반을 구축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해서 거룩한 계보를 이어가게 되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구원이라“는 원대한 개혁을 이루시기 위해,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과 그 국가의 조상이 된 [야곱]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 11절에서 13절까지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유기하신 이유가 그들의 공로나 자질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창세전부터 예정된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택하신 하나님의 개혁이 완성되기까지, [야곱]과 [에서]는 심하게 충돌했습니다.
두 사람의 충돌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었지요.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리브가]와 결혼하고, ”하나님 앞에 자녀를 달라“고 간구했고, 그 응답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리브가]는 ”태 속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때가 되어, [에서]가 먼저 나오고, 그의 발꿈치를 잡고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좋아해서 허기진 상태로 귀가했는데, 그때 [야곱]이 집에서 죽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게 된 [에서]는 야곱에게 ”죽을 좀 달라“고 하였고, [야곱]은 ”형이 가진 장자의 명분을 넘겨준다면, 죽을 주겠다.”고 대답합니다.
[야곱]이 이렇게 행동한 동기와 배경에는 어머니 [리브가]의 영향이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어머니에게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태중에서 있었던 일”을 귀가 따갑게 들었고, 그것은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했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을 항상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인하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분으로 인해, 서게 하시려고, 리브가에게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롬 09-11-12)
그런 [교육의 효과] 때문인지, 아니면 어려서 아직도 철이 없었던 탓인지, [야곱]은 형이 배가 고프다며 “죽을 달라”고 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장자의 명분을 넘겨 달라.”고 요구하였고, [에서]는 신중하지 못하여, [장자의 명분]을 넘기는 대가로 죽을 받아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장작권]이 실제적으로 [야곱]에게 넘어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에서]는 심한 불쾌감을 느꼈고, “혹시나 장자의 명분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평생 야곱에 대한 적의를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생애 말년을 맞은 [이삭]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장남인 [에서]에게 평소 자신이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 별미를 먹고 나서 “축복을 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해 주려고 하니까, 이를 지켜보고 있던 어머니 [리브가]는 동생으로 하여금 형의 옷을 입게 하고, 염소 새끼 가죽을 둘러쓰게 한 다음, 아버지를 속여서 [야곱]에게 축복을 탈취하도록 작전을 벌립니다.
평소에도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는데, 느닷없이 [에서]에게 주려고 하니까, [리브가]는 놀랐을 것이고, 한편으로, [야곱]은 자신의 행위가 아버지와 형을 속이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머니의 권고에 따라 아버지를 속이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평소의 교육과 그에 대한 신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에게 비난을 받더라도, ”축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형의 축복을 탈취하는 사기꾼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야곱이 자신의 축복을 탈취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다시 내려달라.“고 사정했지만, [이삭]은 ”한 번 내린 축복은 변경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태가 여기에까지 이르게 되자, [에서]는 분노하며, “야곱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죽지 않으려고, 빈손으로 집을 떠나, 외삼촌이 있는 [하란]으로 도피해서 억울한 종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겪은 [축복 탈취 사건]입니다.
이것은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만, 그 근원적인 출발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도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 그렇게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쌍둥이를 보면서, 서로 생각이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했고, [리브가]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이삭]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 않았고,“[리브가]의 편애가 낳은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으나, [리브가]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이삭에게 알렸을지도 모르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전통]을 우선시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아버지는 [장남]을, 어머니와 [차남]을 선택한 것이고,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버지는 [전통]을 중시했고, 어머니는 ”[신앙]을 내세우는 구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대립 구도]야말로, ”야곱의 축복 탈취 사건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조금 전에 읽었던, 오늘 말씀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베델]에서, 야곱에게 축복을 내리셨는데, 그 내용은 놀랍게도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한 말씀과 거의 동일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계승자가 ”야곱이라는 것”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서]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했던 [이삭의 의도]는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이로 인해, [이삭의 아들]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불안을 겪게 되지만, 그러나 이 사건으로 당장 야곱이 현실적으로 얻은 이익은 없습니다. 오히려 [야곱]은 부자의 아들이었지만, 빈털터리로 집을 나와, 억울한 종살이를 했고,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형에게 빼앗기는 손해까지 입게 됩니다.
어쩌면, 이 사건에서 최대의 피해자는 [야곱]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야곱]이 낳은 12아들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주인공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의 뿌리가 됩니다.
[야곱]도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험악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 외에는 의지해야 할 데가 없는 “광야와 같은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에게 닥친 저주는 ”결국에는 축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판명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이 [리브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입니다.
이 말씀을 배제하고, [야곱과에서]의 이야기로 읽게 되면, ”야곱이 시기와 질투가 많고, 아버지와 형까지 속이는 사기꾼이었다.“는 인상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리브가]는 남성적인 [에서]보다는, 여성적인 [야곱]을 사랑하여, 그의 욕심을 채워주고 [야곱]이 축복을 탈취하자, [이삭]을 설득하여 [야곱]을 하란으로 도피시게 만든 공범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계시가 [리브가]에게 임하였다.”는 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야곱과 에서] 형제 사이의 충돌의 뿌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실현하고자 하는 [리브가]와/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는 [이삭]의 대결에 있습니다. 그로 인해 두 형제는 [아벨적 공동체]와 [가인형 공동체]로 그 소속을 달리 하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아벨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였습니다. 같은 날, 단 몇 분 차이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두 사람 모두 [아벨적 공동체]의 계보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서로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쌍둥이 형제의 충돌 사건의 주범은 바로 [리브가]라고 할 수 있고요, [야곱]은 방조범에 불과합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입니다.
그가 축복 탈취 사건으로 얻은 것은 세속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야곱]의 축복 탈취 사건으로, 당장 덕을 본 사람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야곱]은 결국에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것은 [에서]의 후손들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야곱]이 남긴 12명의 아들들은 [아벨적 공동체]의 뿌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과 국가라는 위대한 선조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받은 축복은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가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하게 되는 축복은 표면에서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내린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여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축복은 [이삭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야곱이 도주하던 중 베델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축복은 효력이 발생될 수가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결론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 내리는 축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들은 자식들을 위해 축복을 빌어야 하고, “그 축복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될 때야 비로소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섬기는 [아벨적 공동체]는 인간이 공동체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주권자]로 청빙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벨적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권자가 되셔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택하시고,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택함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적 공동체]를 만드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들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온 인류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에 이어 야곱과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킬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는 [야곱]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실 것이라”는 이삭의 기도 속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인간은 온전한 자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의 인간들을 사용하심으로 인해, 당연히 문제는 많이 발생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마저 감수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역사에서 배제시키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승리하시는 방식이고,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이 정착한 곳은 제국의 각축장이었던 곳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용광로와 같은 지역의 한가운데서, 잠시도 쉴 사이 없이 거의 600년의 세월 동안,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으며, 수탈을 당한 속에서도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아주 힘겹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루살렘 성을 지켜야 했습니다.
우리 한민족도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35년 동안 그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600년의 세월 동안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있을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그들의 민족으로 품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민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에 의해 [메시아의 민족]으로 선택되었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으로서 예수님이 탄생할 수 있도록 고초를 당하며, 예루살렘 성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위만으로는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도 [아벨적 공동체]와 [가인적 공동체]로 구분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예수님이 활동하시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당연히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거기에 그들의 약점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은 이런 안타까움을 로마서 9장에서 11장까지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백성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안타까운 기도까지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지심으로, 부활과 승천을 이루셨으며, 이스라엘 민족들을 통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아벨의 삶을 사는 [아벨적 공동체]입니다.
[아벨적 공동체]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으니, 우리는 확실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리브가]가 야곱에게 전해주었던 것처럼, 우리 다음 세대에 [아벨적 공정체]의 정체성을 명확히 전수해 주어야 됩니다.
[요개뱃]이 [모세]에게 하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
어머니를 통해서라도 우리의 [아벨적 공동체]의 정체성은 분명히 전달되어야 합니다.
[아벨적 공동체]의 삶은 ”하나님이 주권자로 통치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합니다.
인간들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고, 우리의 운명을 우리 자신이 지배하려고 하는 순간에,
우리는 [가인적 공동체]로 전락하고 맙니다.
[아벨적 공동체]의 삶의 터전은 광야입니다.
우리가 목적하는 곳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 예루살렘입니다.
우리가 성을 쌓고, 도시를 만드는 순간 [가인적 공동체]로 전락합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가인적 공동체]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 나그네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위로는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광야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대 이후로 도시가 보편화되고, 그 영향력이 확대됨으로써 광야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아벨적 공동체]는 광야가 없으면 “영적인 호흡”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해방을 만끽해야 합니다.
도시 속의 교회는 인간에게 광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도시의 포로가 되어, 광야의 본성을 잃어가지 않도록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울며 씨를 뿌리기 위해 도시로 다시 들어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벨적 공동체]로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이 선하신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요나]처럼 멸망할 도시인 [니누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해방을 누렸던 것처럼, 멸망해 가는 도시에서 구원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까지 숨어서 지내거나, 세상과의 소통을 단절한 채, [고립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 내려주신 지상명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명령]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가인적 공동체]와의 갈등을 감수해야 합니다.
[가인적 공동체]가 [아벨적 공동체]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의 정체성은 소멸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들은 [아벨적 공동체]를 평화 속에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에 대한 충성스런 증인으로서의 우리의 임무를 소홀히 하기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은 “우리가 그들과 아무런 갈등 없이 평화롭게 산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체성을 잃었다.“는 것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기까지 고난을 겪으며, 사명을 감당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며, 교회를 지키고, 공동체를 위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명을 감당해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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