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고후7:8~16) 말씀: 이재훈 목사님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한 것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데 고난이 따르지만, ”고난을 기쁘게 감당한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런 기쁨을 알기 때문에,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을 느꼈습니다.
드디어 바울은 오래 동안 기다렸던 소식을 디도에게서 듣게 됩니다.
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후서의 사이에서 받은 편지인데, 고린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보낸 3번째 편지입니다.
제일 먼저 보낸 편지에 대한 회답을 디모데를 통해 보냈으며, 그때 들은 소식은 고린도교회 소식에 ”문제가 많다.“는
소식이고, 성도들 간에 ”파벌 의식이 팽배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의 권위를 부인하고, “사도로써 의심하는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고린도교회를 방문합니다.
그때 고린도교인들의 비난에 바울은 충격을 받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거짓된 사람의 꼬임으로,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말과 함께,
”바울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의심을 받고, 공격을 당하는 상황입니다.
보통 사람과 같으면, 고린도교회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텐데,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무슨 말을 전하려면, 직접 가거나,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시대이니까,
바울은 디도가 오기를 기다렸으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디도에게 눈물겨운 회개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후에, 디도가 마침내 바울을 찾아와서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전하니까,
그 소식을 듣고, 그 때 자신이 숨겨놓았던 소회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궁금했던 것은 고린도교인 근황에 근심이 있었는데, 디도의 권면을 받아드려서 생각들을 정리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8~9절 말씀을 그런 맥락으로 읽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편지로 인해, 여러분을 근심하게 했다할지라도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 편지가 여러분을 잠시 상심하게 했다는 것을 내가 알고, 후회하기는 했으나, 지금은 내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을 근심하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므로, 결국 여러분은 아무것도 손해를 본 것이 없습니다.“(고후7:8~9)
바울은 3번째 편지에서 책망과 교훈을 표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동안 전한 소식으로 근심하게 되었지만, 그 근심은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나타난 근심이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말이니까,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듣기에 나쁜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참된 사람은 할 말은 반드시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가면을 쓰고, 자기를 위장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결코 옳은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가면을 쓰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때로는 직설적으로, 때로는 반드시 정확하게 전달했습니다.
그에게 사랑이 없었다면, 고린도교인들과 그냥 단절하면 되겠지만,
바울이 믿었던 진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진정한 위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근심을 해서는 자주 하면 안 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근심]은 ”위로와 기쁨을 주게 됩니다.“
▶ 세상의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먼저 세상의 근심은 어떤가요?
① 죄 자체가 아니라, 죄가 가져온 결과가 자신의 이익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② 자기 자신에게 나쁜 결과 때문에만 슬퍼합니다.(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③ 자신의 명예가 훼손된 것에 대하여 분노하고 보복하고자 합니다.
그 사례를 들어보면, 에서의 슬픔은 장자의 축복을 가볍게 여긴 자신의 죄를 슬퍼하지 않고,
권리를 잃은 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보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어떤가요?
① 죄그 자체를 미워하며, 자신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 자체를 슬퍼합니다.
② 다른 사람에게 끼친 나쁜 결과까지를, 슬퍼합니다.
③ 자신의 불명예를 기꺼이 감당하고, 책임 있는 행동의 변화를 취하려고 합니다.
그 사례를 들어보면, 다윗의 슬픔은 시편 51편에 나타난 대로 정직하게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돌이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근심은 “슬퍼하는 것”은 유사하지만, 동기는 다릅니다.
요즘 사회를 “초 개인주의 사회“라고 하는데,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자기 죄를 증명하려는 일은 매우 불편해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를 지적한다.”는 것은 거부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깨달아야 하지만, 이 시대는 정직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잠언 27장 6절 말씀에, “친구의 꾸지람은 진실하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이는 것이다.”(잠27:6)
이 말씀은 친구는 상처를 주어도 신실한 우정의 표현이지만, 원수는 입을 맞추어도 조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실한 친구의 꾸지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도, ”사랑가운데 진리를 말하며, 범사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나야 합니다."(엡4:15)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나가려면, “사랑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서로가 하나님 뜻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근심은 불순종을 깨닫고,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쁜 소식이 들려와도 포기하지 않고, 편지를 쓰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바울의 이런 영적 상태는 어떤 것인가요?
(1) 첫째로, 죄를 정죄하지 않고, ”연합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바울은 진실하게 권면을 했고, 사랑 가운데서 그들을 대했으므로,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연합하려고 노력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3절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내가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여러분이 우리 마음에 있어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고후7:3)
바울은 고린도교인들과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나도 고린도교인들과 같이, 생사를 같이 한다.“는 의미입니다.
(2)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신뢰와 자랑을 계속 표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7장 4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나는 여러분에 대해, 많은 신뢰감을 갖고 있고, 여러분을 위해 자랑할 것도 많습니다.
우리의 온갖 환란 가운데서도 내게는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칩니다.(고후7:4)
여기에 [뢰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것은 디도에게 책망도 하고, 자랑도 했는데, 무엇을 자랑했을까요?
아무리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에게 장점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 장점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해 주면, 그 말이 본인에게 전달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사람이 변하게 됩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를 할 때, 저를 힘들게 하는 분이 계셨는데, 다른 성도들에게도 “그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 모르게 칭찬을 해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주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바울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많이 있지만, 디도에게 좋은 것만 애기해 주어서
그 말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전달되도록 조치했습니다.
예전에 하목사님은 문제가 있는 목회자에게 “나는 그 사람의 장점만 보기로 했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3) 바울은 시간을 가지고, 변화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6-7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러나 비천한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를 돌아오게 하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돌아온 것뿐만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 받은 위로로 우리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내게 대해, 사모하는 것과 애통해 하는 것과 열심을 내는 것에 대해,
그의 보고를 받고, 나는 더욱 기뻤습니다.”(고후7:6~7)
디도가 돌아왔을 때, 바울이 기뻐한 것은 “위로가 되었다.“는 말이고,
바울이 ”변화의 소식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감격을 했다.”는 말이고,, 바울이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을 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의미이니까,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바라고, 그 사람 자신도 “별을 받기를 원했다.“는 말이니까,
”바울과 관계가 개선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서로의 근심이 해소되었고, 고린도교인들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가게 되었습니다.
진실한 친구로써의 책망은 바람직한 책망입니다.
우리들도 근심이 있을 때,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오해가 풀리듯이, 위로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하는 근심은 우리가 스스럼없이 서로 만나면서, 근심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산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니니까, 회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사는 삶, 더욱 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로잡힌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하는 근심이 우리에게 나타나길 기대하며,
그렇게 자신 있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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